(사진=연합뉴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가 검거되더라도 재판이 끝날 때까진 오랜 시일이 걸린다. 그동안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여러 번 입증해야 하고, 그 동안에도 끝없는 유포 불안에 시달린다. 이름은 물론 나이, 학교, 주소 등도 다 공개돼 퇴사, 자퇴하거나 개명, 성형하기도 한다. 사회와 단절되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에도 처한다.
가해자 처벌 강화는 당연한 조치다. 다만, 디지털 성범죄는 기하급수적인 유포를 막는 게 급선무다. 문제는 불법 촬영물이 얼마나 유포됐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진화하는 디지털 성범죄를 따라가기엔, 현재 규제나 법이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대응책이란 한계가 있다.
또 다른 n번방을 막기 위해선 제도도 필요하지만, '불법 촬영물은 범죄물이어서 봐선 안 된다'는 인식 개선과 '네가 자초한 일'이라는 피해자 편견을 거두는 게 먼저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 "네 잘못이 아니야!"…모두의 인식 개선이 절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기존 성범죄 피해자들보다 더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네가 먼저 그런 사진을 올렸잖아, 용돈 받으려고 한 거잖아"라는 이른바 '피해자 유발론' 탓이다.
서울시 여성정책담당관 김지현 주무관은 "아동·청소년은 유인하기 쉽고 성착취물을 얻어내기 쉬운 대상으로 보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가해자들의 잘못"이라면서 "절대 청소년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해자의 접근 방식은 이런 식이다. 청소년들은 학교나 친구, 가정에서의 모습 등을 SNS에 자유롭게 올리는데, 가해자가 그런 걸 보면서 아이들을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해 주고 칭찬해 주고 예뻐해 주는 어른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 가해자는 그 틈을 노리고, 어린 청소년들은 결국 피해자가 되고 만다.
지명규 여성정책담당팀장도 "청소년들은 본인에게 관심 가져주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그루밍으로 연결되는데, 나쁜 의도를 알고 있었으면 애당초 접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피해자는 어쩌다 한번 만난 가해자에게 당하지만, 가해자는 이런 범죄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면서 "이런 범죄 구조를 알면 결코 피해자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장은 "길을 가다 폭행을 당한 사람에게 왜 그 길을 갔냐고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범죄 피해자들에겐 유독 왜 그 길을 갔느냐, 왜 저항하지 않았냐며 비난한다"면서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청소년에게 용돈을 주겠다며 접근했다면, 약점을 노린 범죄일 뿐, 용돈을 받고 싶어 한 아이들의 잘못으로 봐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의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지난달 25일 오전 검찰 송치를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 "텔레그램은 수사 불가" 언론 보도가 피해자를 더 절망시켜요디지털 성범죄를 둘러싼 언론 보도도 피해자를 더 주저앉게 만들고 있었다. "텔레그램은 가해자를 잡기 어렵다, 수사가 힘들다", "디지털 성범죄는 형량이 낮다", "유포된 영상은 모두 삭제하기 어렵다"는 기사를 보고 무력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나무여성인권사무소 이희정 지지동반자는 "피해자들이 대처 방안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다 언론 보도도 접하게 되는데, 그런 이런 기사를 보고선, '정말 이래요?'라고 물어본다"면서 "아이들은 수사 기관도, 법원도 못 하는데,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며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한다"고 꼬집었다.
설령 텔레그램이 가해자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수많은 범죄 피해자가 있으니 수사 협조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거나 '가해자 정보를 주지 않는 텔레그램이 잘못된 것'이라는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플랫폼 고도화로 수사 기관도 한계가 있다'고만 보도되는 건 조금도 도움 되지 않는 기사"라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할 수 있고, 해보겠다'는 의지를 모아 상황을 극복해나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야동 아니라 성착취물·범죄물…"아무도 검색하지 말고 안 보면 돼" 발견 즉시 신고전문가들은 n번방 관전자들이 "단순 호기심에 봤다거나 그저 야한 동영상 봤을 뿐"이라는 인식이 가장 잘못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영란 소장은 "'그저 야동을 돌려본 것이라거나 단순 호기심에 봤다'고 변명하지만 n번방 같은 사건은 엄연한 범죄"라면서 "바로 눈앞에서 여성이, 아동이 성착취를 당하는데 집단으로 보면서 같이 웃고 희롱한다면 함께 범죄를 저지른 것과 똑같다"고 일침을 놨다.
그는 "'빨간 불에는 건너지 않는다'는 것처럼 '불법 촬영물은 봐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절실하다"면서 "불법 촬영물은 야동이 아닌 범죄물인 만큼, 절대 보지도 유포하지 말자는 사회적인 약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혹시 주변에서 누군가 아무 범죄의식 없이 본다면, 보지 말아줄 것을 권하고 해당 사이트나 SNS 등은 반드시 신고해달라"고 당부했다.
결국 제도도 필요하지만, '아무도 영상물을 보지 않는다면 n번방은 사라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희정 지지동반자는 "영상물이라는 게 옷을 입든 안 입든 성적 촬영물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보는 개념이면 다 범죄"라면서 "업로드하고 다운받아 보는 횟수만큼 범죄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설령 피해자가 촬영에 동의한 영상이라도, 찍을 당시에는 수많은 관전자와 공범자를 초대하지 않았다"면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보지 않겠다'는 인식이 있어야 모든 성범죄가 근절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제2 n번방' 운영자 로리대장태범의 재판이 열린 31일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디지털성폭력대응 강원미투행동연대'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텔레그램 대화방을 통한 성 착취물 유포자 등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디지털 성범죄, 신고 주저할수록 피해↑…'지지동반자' 피해자 원하는 장소로 방문·상담나이가 어릴수록 신고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보통은 혼자 끙끙 앓다가 부모나 교사가 우연히 알게 돼 신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너무 늦다. 유포물 피해의 경우는 그야말로 시간 싸움이다. 빨리 대처할수록 확산이나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다.
김지현 주무관은 "서울시 지지동반자에 전화만 주면 방문하지 않아도 직접 피해자가 원하는 곳으로 찾아가 경찰 신고나 고소장 작성부터 사건 해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원한다"면서 "철저히 비밀 하에 진행될 수 있으니까 주저말고 전화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지지동반자 제도는 수사 지원뿐만 아니라 불안에 떠는 피해자를 위한 심리 상담이나 응급 치료까지도 제공한다. 필요에 따라 보호자 심리치료도 지원한다. 부모의 경우, 자녀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됐다는 걸 받아들이기도 힘들지만, 가까운 주변에서 끊임없이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걸 얘기해줘야 하는 이유에서다.
시는 아울러, 디지털 성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잠재적 피해자 구제에도 나선다. 가해자들이 SNS에 접근해 성 착취로 유인하는 구조를 역 이용해, 전문 상담사가 같은 방법으로 위험에 노출된 아동·청소년들을 조기 발견, 범죄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텔레그램, 채팅 앱 등을 통해 이뤄지는 아동·청소년 성 착취 영상물 운영자, 구매자, 소지자 등 가해자를 추적해 이를 고소·고발하는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 추적 프로그램'도 함께 추진한다. 5월 중 시행 예정이다.
김 주무관은 "디지털 성범죄는 플랫폼에 따로 이동하는 특성이 있다"면서 "웹하드를 단속하니 SNS, 채팅앱, 텔레그램 등 메신저로 이동한다"면서 "아동·청소년 성착취 문제에 대한 인식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플랫폼 규제 부분도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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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 범죄는 없다"… 사전 예방 위한 AI 기술개발·상담·삭제·수사 등 원스톱 지원 필요 진화하는 범죄 속도를 법이 따라가긴 힘들다지만, "완전 범죄는 없다"는 게 수사기관의 얘기다. 텔레그램 추적은 힘들다지만 끝내 '조주빈'을 검거했다. 조주빈이 붙잡히자 다른 공조자들도 꼬리가 밟히고 있다. 일부는 자수하기도 했다.
그 방에 있던 26만 명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수치지만, 경찰은 인터폴 등과 공조해 계속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실제 아동 성착취물 다크웹사이트 국 제 공조 협력으로 아동성착취물 제공혐의자를 검거, 실형까지 받아낸 사례도 있다. 해외에 서버가 있더라도 경찰청, 방송통심심의위원회 등이 불법 영상물 관련자를 수사하거나 규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디지털 성범죄 예방을 위한 기술 개발도 진행 중이다. 인공지능이 유해 콘텐츠 유형을 학습, 상시 모니터링과 분석을 통해 유포물 삭제 지원은 물론 사전 예방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성범죄를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를 통일하고 정책담당자의 법 집행을 용이하도록 디지털 성범죄 정의와 범죄유형을 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현재 디지털 성범죄 유형은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와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음란물 유포죄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범죄자 처벌이나 피해자 보호 판단 시 디지털 성범죄 여부 파악에 시간이 걸리고, 혼선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피해자가 있는데도 법적 공백으로 처벌하지 못하거나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없도록 디지털 성범죄 범위를 좀 더 광범위하게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또 " 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삭제 지원이 되고 있는데 피해자를 위한 진정한 원스톱서비스를 위해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