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허진호 감독을 만났다. (사진=황진환 기자)
※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내용이 나옵니다.'천문: 하늘에 묻는다'(감독 허진호)는 영화 '쉬리'(1999) 이후 최민식과 한석규를 붙여놨다는 점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연기를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탄탄한 배우진으로도 화제가 됐다. 1962년에 데뷔해 올해 58년차를 맞은 신구를 비롯해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 김원해, 임원희, 오광록, 박성훈, 전여빈, 이중옥 등 믿고 보는 배우들이 제 몫을 해냈다.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허진호 감독은 "신구 선생님 역할이 제일 컸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132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역시 이들의 훌륭한 연기를 '잘라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사는 없어도 영화의 흐름을 더 잘 따라가기 위해 필요한 장면이 유지된 까닭이다.
일문일답 이어서.
▶ '천문'을 보면 세종(한석규 분)은 언제 어디서나 백성에게 좋은 것을 생각하는 성군의 모습이 강조된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느낌인데 확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선왕이 묻힌 피가 남은 검은 곤룡포를 입었을 때다. 그 장면을 넣은 이유는.편집된 장면이 있다. 영의정(신구 분)과 신하들이 모여서 '우리가 이긴 거 아냐?' 하는 건데, 영의정은 '결국 전하는 그 논리를 지켰다'라는 대사를 한다. (세종은) 자기 힘을 보여주더라도 피바람으로 갈 생각은 없었던 거다. 안여를 부러뜨린 것도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했던 것일 테고. 지도자로서 그런 강한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다. 강한 모습의 세종을.
▶ 세종 대사 중 정남손(김태우 분)에게 "개새끼"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애드리브인가.시나리오에 없었고, 현장에서도 없었다. "너냐"(라는 대사)부터 슛이었다. 개새끼는 준비하는 부분이었는데 그게 찍힌 거다. 뭔가 긴장감이 생기는 것 같고, (분위기가) 촥 바뀌는 것 같아서 한석규 배우랑 얘기를 많이 했다. "괜찮은 것 같은데 넣겠습니다"라고 하니 "감독님, 넣으십시오" 해서 사용하게 됐다. 조금 걱정은 했다. 세종대왕이 욕해도 되나? 하고. 스태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웃음)
'천문'에는 신구,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 오광록, 김원해, 임원희 등 화려한 조연진이 출연한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 관노 출신인 장영실(최민식 분)은 면천된 후 궐에서 일할 때도 미묘하게 무시당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본인도 위치가 달라졌다고 해서 남 앞에서 권세 부리는 성격이 아니고. 그런 그가 명나라 사신에게는 무례해 보일 만큼 기세 좋게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 장면이 탄생한 배경도 궁금하다.
그 장면은,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극적 긴장감이 있다. 그 긴장감 속에서 명 사신들과 잔치 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영실의 측우기 얘기를 해 보고 싶었다. 측우기라는 게 정말 대단한 거다. 그게 (서양보다) 200년인가 앞섰다고 하니. 장영실이 가지고 있던 거침없는 느낌도 보여주면 어떨까 싶었다. 계속 노비로서 조아리고는 있었지만 장영실에게 다른 모습도 있었을 테니까.
▶ '천문'에서는 세종이 개혁적인 군주로 그려졌다. 신하들의 사대주의가 강조되니 세종의 자주성이 더 눈에 띄었던 것 같다.사실 (신하들은 당시의)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렇다고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다만 이들의 생각에서는 이것(명나라 사대주의)이 더 옳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종 입장에선 '계속 그렇게만 살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언젠가는 홀로 설 수 있는 것 아니냐'였겠고. 물론 세종도 현실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장영실이 만든 기구를 명나라의 뜻대로) 태우긴 하지만 장영실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천문 기기를 다시 만들 거라는 생각도 했을 것 같다. 입장 차이다. 더 큰, 홀로서는 나라를 꿈꿨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세종이고, (조선이) 홀로서는 게 불가능하다고 본 게 영의정이다. 그 둘의 관계에서 긴장감이 나온다.
▶ 최민식과 한석규는 아주 오랜만에 한 작품에 나온 것인데도 '역시'라고 할 법한 조화로운 연기를 보여줬다. 둘을 붙여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장면을 하나만 꼽는다면.둘이 독대하는 장면. 원래 촬영할 때 감독이랑 배우들이 얘기를 해서 어느 정도는 저도 아는데, 그땐 둘이서 계속 뭘 얘기하더라. 저희가 한 번 알아서 보여드리겠다며. 그래서 "알겠습니다" 하고 현장에서 봤는데 정말 '관객'으로서 봤다. (웃음) 제가 커트도 잘 못 하고 쭉 빠져서 본 것 같다. 그 장면을 보면 디테일이 참 좋다. 영실이 들어오면 세종이 슥 바라보는 반가움이 있고, 영실은 세종에 대한 반가움이 아주 살짝 보이다가 삐짐도 보인다. '저를 버린 줄 알았다'면서도 (기분이) 풀리는.
세종은 "안여 바퀴 내가 그랬다"라는 대사도 굉장히 일상적으로 하지 않나. 중요한 얘기를 툭 던지듯이 대사하는 느낌이 좋았다. 세종과 영실 사이의 툭툭 치는 농담이, 왕과 신하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대사는 아닌 것 같다. 그런 걸 배우들이 가져갔던 것 같다. 절체절명의 힘든 상황에서, 각자 벼랑 끝에 있는데도 그런 대사를 할 수 있었던 건 최민식과 한석규만이 가져갈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나. 정말 묵직한, 어떤 악기로 비유하자면 협연 같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협연! (독대 장면에서 장영실이) 우는데 바로 받더라. '벗이 있지 않으냐' 하면서. (영화에 나온 건) 두 번째 테이크였던 것 같다.
'천문'은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 신구,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 등 조연진도 화려했다. 캐스팅 계기는.
영의정 역을 누가 할까, 최민식-한석규 배우랑 저희가 고민했다. 신구 선생님이 좋다고 해서 부탁을 드렸다. 김홍파 배우는 최민식 배우와 친구이기도 하고, 그동안은 악역을 많이 했는데 실제로 만나면 굉장히 좋다. 호인이다. 강직하면서도 따뜻함이 있는 느낌이 좋았다. 김태우 배우는 (웃음) 얄미운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김태우 배우는 한석규, 최민식, 신구 이런 배우들과 같이해 보고 싶었다고 했었다. 배우들이 '아, 이런 배우들과 같이해 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있더라. 거기엔 신구 선생님 역할이 제일 컸던 것 같다. 허준호 배우도 마찬가지인데 신구 선생님이랑 (극중에서) 대등하게 붙지 않나, 그 역할 자체가. 정말 존경해 왔던 선배 배우와 자기가 대등하게 붙는다는 긴장감, 그게 뭐랄까 아름다웠다. 긴장감과 희열. 마치 제자가 스승과 붙는 거니까. 바둑 같은 거다. 어렸을 때 우러러봤던 사람과 같이하는 아름다운 긴장감이 있다.
▶ '천문: 하늘에 묻는다'라는 제목이 나온 것과, 132분이라는 다소 긴 분량을 유지한 이유는.제목은 제작자랑 같이 얘기하면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세종과 장영실이 근정전에 누워서 하늘을 보고 무언가 물어보지 않았을까 해서. 러닝타임은… 연기 때문인 것 같다. 저희 연기 호흡이 대사 위주로 돼 있지는 않다. 대사로만 했다면 2시간 안쪽으로 가져갈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대사가 아닌 부분의 연기를 자르기가 싫었다. 최민식, 한석규, 신구, 허준호, 김태우, 김홍파 등 배우들의 호흡을 가져가고 싶었다.
▶ '시동', '백두산'과 함께 국내 연말 영화 3파전 주인공으로 꼽히는데 부담되지는 않나.너무 상투적인 질문을… (일동 폭소) 느낀다. 긴장감 같은 걸. 다 잘될 수 있지 않을까. 잘됐으면 좋겠다.
▶ 허 감독의 로맨스/멜로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 차기작 계획도 궁금하다.좋은 이야기 생각이 나면 해야겠지. 할 거다! (웃음)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도 계속 기억해줘서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동시에 최근에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차기작은 준비하고 있는데 아직 정리가 안 됐다. <끝>
'천문: 하늘에 묻는다' 허진호 감독 (사진=황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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