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로 가족들을 잃고, 수류탄에 다친 오른발을 잘라내야 했던 쯔엉티투(80) 씨(자료사진=김광일 기자)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및 유가족 103명이 피해 진상조사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정부가 최근 이를 위한 진상조사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공식 입장을 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2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따르면 국방부는 이달 9일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피해자 및 유가족 103명의 진상조사 요구에 대해 "진상조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취지의 공식 회신을 발송했다.
이번에 피해자들이 받은 회신서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행위가 공론화된 지난 1999년 이후 20년 만에 한국 정부가 내놓은 첫 공식 답변이다.
앞서 피해자들과 민변은 지난 4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에 관한 진상조사와 정부의 공식 사과, 피해자 존엄·명예회복 조치 등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국방부는 회신에서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 인정, 사과 및 피해 회복 조치는 관련 사실에 대한 진상조사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면서 "하지만 국방부가 보유한 한국군 전투 사료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이 문제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려면 한국 측 단독 조사가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 정부 공동조사가 선행해야 한다"면서 "공동조사 여건은 아직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보관한 자료로는 한국군의 학살 사실을 확인할 수 없고, 사실관계를 밝힐 진상조사는 여건상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변 "자료 없다는 정부 못 믿어…최소한의 진상조사도 없어"민변은 정부가 내놓은 첫 공식 답변이 참담하다고 평가했다. 민변 관계자는 "전쟁범죄를 공식 문서로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규모 전쟁범죄가 한국군 사료로 기재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정부의 논리를 반박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주장한 학살 장소·일시와 한국군의 작전·교전 일지 등을 비교하는 식의 최소한의 진상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또 민변은 자료가 없다는 정부 답변도 믿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1969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했고, 현재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조사 자료를 보관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민변은 2017년부터 이 자료 목록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국정원은 지난해 11월 패소 판결에도 이를 따르지 않고 다른 비공개 사유(개인정보)를 들어 비공개하고 있다.
이번 청원을 진행한 민변 임재성 변호사는 "양국의 공동조사가 어렵다면 우리라도 자체 진상 조사를 벌여야 한다"며 "일제강점기 전쟁범죄 피해에 대해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와 베트남전 피해를 대하는 자세는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중심주의' 강조하며 일본 책임 물으면서…베트남전 태도는 '모순'민변은 "일본 정부에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전쟁범죄 책임을 물으면서 근거로 삼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왜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한 피해자들에게는 부차적인 것이 되느냐"며 "정부의 피해자 중심주의가 자의적이지 않길 바란다. 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 회복 요구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는 한·일 정부가 지난 2015년 공동 선언한 위안부 합의를 폐기하면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일본 기업에 대한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지난해 대법원 판결 이후 불거진 한일 갈등 국면에서도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견지해왔다.
한·베평화재단 석미화 사무처장은 "민간 피해자들에게 정부의 공식 의견서를 베트남어로 번역해 우편 발송할 계획"이라면서 "용기를 내준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민변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베트남전 피해 진상조사 착수 △확인된 사실에 대한 사과·위령 사업 진행 등을 요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