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우리네 말과 글을 없애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사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감동 여정을 그린 영화 '말모이'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다. 그 덕에 '우리'를 규정짓는 언어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여기 현대판 '말모이'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공무원의 적이 됐다"고 소개한다.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 이야기다.
이 단체는 지난 10일부터 매일 정부 18개 부처에서 내놓는 모든 보도자료를 전수검사하고 있다. 그렇게 쉬운 말 사용 등을 규정한 국어기본법을 어긴 사항을 발견하면 해당 보도자료 작성자에게 직접 개선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다.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상임대표는 14일 CBS노컷뉴스에 "(개선 요구 공문을 받은 공무원들로부터) '이런 걸 왜 보내느냐'고 항의 전화가 빗발쳐서 일을 못할 지경"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지난 6년 동안 정부 중앙부처 17, 18곳 보도자료를 매년 석달치씩 분석해 부처별 통계를 내 왔는데, 뚜렷한 개선이 이뤄지지 않더군요. 이번에 직접 그 (보도자료) 작성자들에게 개선해 달라고 항의하고 요청하는 방법을 택한 이유입니다."
이건범 대표도 영화 '말모이'를 봤다고 했다. 그는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만든, 사람들 감정선도 잘 건드리는 좋은 영화"라고 총평했다.
"국어 관점에서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당대 일제가 벌인 우리말 탄압을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영화적으로 제대로 나타냈어요."
일제라는 거대 권력에 맞서는 영화 '말모이' 속 주인공들과 현실의 한글문화연대 활동은 분명 맥을 같이 한다. 이건범 대표는 "영화에 그려진 일제시대 우리말 지키기가 '민족'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민주' 운동 성격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영화 배경인 일제강점기는 민족 단위 국민국가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은 암울한 식민지 상황이었잖아요. 그러한 측면에서 민족국가, 즉 우리 민족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 당면 과제였다고 봅니다. 민족 정체성을 뚜렷이 하는 데 말과 글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분들 노력과 희생 위에서 우리 말과 글이 정립됐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언어 탓에 헌법에서 보장하는 알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대표는 "국가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에 나라에서 만들어내는 용어는 그만큼 국민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과거 민족주의적인 언어 운동 성향이 이제는 더 나아가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데 한글문화연대 역할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베리어프리' '커뮤니티 케어'…언어 장벽 낮춰야 할 정부부처 모순"
영화 '말모이'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일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쉬운 말과 글은 권력의 핵심 요소인 지식에 접근하는 통로를 넓힌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발전과 궤를 함께할 수밖에 없다.
이 대표는 "부든 지식이든 양극화가 심해지는 시대라고들 말한다"며 "알권리를 막는 언어 장벽이 높아질 경우 그러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분명 심화될 위험이 커진다"고 진단했다.
"그러한 장벽을 낮추는 데 힘써야 할 보건복지부에서조차 '베리어프리'(무장애·장벽없는)라는 말을 앞장서서 쓴다는 것은 모순이죠. 마을에서 사람들을 함께 돌보는 활동을 '커뮤니티 케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러한 언어 사용은 복지를 누려야 할 사람들에게 단순 시혜 차원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데 걱정이 앞섭니다."
그는 "새로운 문물이 들락날락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말로 된 학술·기술 용어를 자꾸 만들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말을 이었다.
"이 점에 비춰 본다면 우리는 일본에 비해 너무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손을 안 대고 투자를 못하고 있는 거죠. 일본에서 노벨상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닐 겁니다. 그들이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자기네 말에 뿌리내린 학술용어 등을 만들어냄으로써 일반인들도 연구·기술 분야에 접근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춘 덕이 커요. 우리는 그 점에서 너무 미약합니다."
이 대표는 "모든 학술·기술 용어를 우리말로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말들은 나라에서 먼저 쉽게 만들려고 애써야 한다"며 "그것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가에서 투자하고 전문가들이 함께 연구해 퍼트려 나가면서 공감대를 만들 때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 "호떡이 왜 호떡인지, 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지 아니?"
영화 '말모이'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말모이'는 "호떡이 왜 호떡인지 아니?" "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지 아는가?"라는 대사를 반복하면서 공동체를 유지·발전시키는 말과 글의 가치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 대표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뿌리를 모르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그 뿌리에 바탕을 두고 말과 말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울타리'를 뜻하기도 하는 '우리'라는 말은 특정한 거리 안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금은 한 나라에 사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바깥과 대비해 '우리'라 부르잖아요. 그 말은 분명 우리네 정체성을 품고 있어요.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어원사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압니다. 너무 뒤늦게 투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내용을 바탕으로 초중고 교육에서 우리 말의 뿌리를 잘 가르치고 살려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만 학생들도 새 말을 만들어낼 때 그저 남을 비하하는 표현이 아니라, 새로운 현상이나 개념을 슬기롭고 발랄하게 나타내는 데 우리말 뿌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지론이다.
"그것이 우리말을 둘러싼, 우리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체성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말 뿌리를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는 과거지향적 인식을 넘어서는, 우리말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 말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구현해내는 작업이 절실한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대표는 영화 '말모이'를 봤거나 볼 시민들에게 "현재 우리 말과 글이 소멸될 위험은 없지만, 그것을 제대로 가꾸고 지켜나가는 일이 지금 세상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를 고민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적이 분명했어요. 그만큼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사랑해야 할 이유도 분명하고 선명했죠.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지금 시대에는 그러한 적이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거 선배·선열들이 우리 언어를 지켜 온 데는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전부는 아니었을 겁니다. 이 영화를 통해 지금도 어려운 말과 글로 인해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말과 글이 지닌 민주주의 가치를 되새겨 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