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만 잘 했어도'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심석희(한국체대)가 지난달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의 항소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 심석희(한체대)의 폭행 및 성폭행 피해 폭로와 관련해 체육인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각 종목 단체와 대한체육회가 엄벌을 내리지 못한 까닭에 '심석희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심석희는 지난 8일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세종을 통해 조재범 전 대표팀 코치에게 17살 미성년자였던 2014년부터 4년 동안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며 고소했다고 밝혔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에서도 몹쓸 짓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성폭행을 당한 곳이 국가대표 선수촌과 태릉빙상장 라커룸 등 공개적인 장소였다는 점이다. CCTV 등이 설치되지 않은 은밀한 공간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미 상습 폭행으로 조 전 코치를 고소한 심석희는 엄벌을 해달라며 지난달 추가 고소했다.
물론 조 전 코치는 법률 대리인을 통해 성폭행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조 전 코치는 심석희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때린 것은 물론 국가대표 선수들까지 폭행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런 심석희의 폭로는 체육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가 화들짝 놀라 연일 대책을 쏟아내고 있고, 젊은빙상인연대는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지도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선수들이 5~6명 더 있다"면서 "이들 중에는 고교생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체육계는 분노를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심석희가 당했다는 성폭행 자체가 충격인 데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목을 떠나 한국 체육계가 지닌 고질적인 병폐라는 지적이다.
젊은빙상인연대와 문화연대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재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진상규명, 재발방지를 촉구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한 국가대표 출신 체육인 A 씨는 익명을 전제로 체육회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A 씨는 "10여 년 전 여중생 선수의 성폭행 피해 등 한국 스포츠의 성폭력 실태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당시 해당 지도자는 자격 박탈 징계만 받았다"고 돌아봤다. 이어 "만약 당시부터 '원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가 확실하게 자리잡았다면 이런 사태가 벌어졌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처벌 자체가 약한 경우가 많은 데다 영구 제명된다고 해도 슬그머니 복권돼 돌아오는 경우도 적잖다는 게 문제다. A 씨는 "비위를 한번만 저질러도 영영 돌아올 수 없다면 내 밥그릇인데 무서워서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몇 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경우를 보면서 경각심도 없어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지난 2016년 테니스 선수 출신 김은희 씨는 초등생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지도자가 여전히 코치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해당 코치는 다른 선수를 성추행해 면직 처분을 받았음에도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김 씨는 해당 코치를 고소했고, 이듬해 징역 10년과 120시간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 처벌을 이끌어냈다.
이런 경우는 심석희가 몸담은 빙상계에도 비일비재하다. 한 빙상인은 "4년 전 한 지도자가 고교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대한빙상경기연맹에서 영구제명됐다"면서 "그러나 해당 지도자가 변호사를 사서 '서로 좋아했던 사이'라고 주장해 다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러니 심석희 사건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솜방망이 처벌이 범죄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체육회는 10일 "앞으로 성폭력 가해자는 무관용 원칙에 따라 다시는 체육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10년 전에도 이런 원칙을 세우고 이를 잘 지켜왔다면 과연 심석희 사태가 벌어졌을까. 향후 체육회와 각 경기 단체들의 성폭력 근절 의지를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