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까지 진출해 온 예멘 난민, 전세계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자말 카슈끄지 암살. 중동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현재 중동 지역은 예멘과 시리아의 내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 미국과 러시아의 개입, 이슬람국가(IS)의 잔존 등으로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우리 경제의 큰 변수 중의 하나인 원유 가격 변동의 진앙지이기도 하고 한국 기업의 플랜트 수출의 주요 시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에 비해 아직도 우리는 중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우리가 중동에 관하여 잘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점에 대한 중동 전문가의 연재글을 싣는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
① 예멘 난민 문제 ② 순니(Sunni)/쉬아(Shia)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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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기 전 명지대 교수
현재 중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순니파와 쉬아파 간의 갈등이다.
난민 문제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유발한 시리아와 예멘의 내전,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 등이 한편으로는 순니와 쉬아 간의 갈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리아 내전은 현 정권을 차지하고 있는 쉬아의 한 분파인 알라위를 지원하는 그룹과 순니파가 주를 이루는 반정부군을 지원하는 국가들 간의 투쟁이다.
시리아 내전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알라위를 지원하는 그룹은 이란, 헤즈볼라 등이고 반정부군을 지원하는 파는 터키, 사우디/UAE 등 순니파 국가들이다.
예멘의 내전 또한 순니파인 중앙정부를 지원하는 사우디/UAE 등과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종파 간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발현과 분파 과정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이슬람 건축물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이슬람은 무함마드에 의하여 발현된 종교이다.
570년 메카에서 탄생한 무함마드는 유복자이고 모친도 일찍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
그 결과 대상을 하는 삼촌(아부 탈리브) 밑에서 성장하였다.
무함마드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정규 교육을 못 받은 문맹자이지만 삼촌을 따라 대상 길을 오가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관하여 많은 귀동냥을 했다.
610년 메카의 동굴에서 기도를 하던 중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계시가 시작됐다.
계시의 내용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신(알라)은 유일하고, 하루에 5번의 기도를 하고 생전에 자선을 베풀고 선행을 하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여타 신앙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그 당시 메카를 통치하던 쿠라쉬 부족에게는 큰 위협이 됐다.
당시는 노예제도가 있었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으며 특히 메카는 수많은 신들의 집합체로 매년 종교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구전에 준하면 당시에 대상 길을 오가던 수많은 상인들과 지역 주민이 300여 개가 넘는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메카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조건으로 메카의 귀족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신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유일신을 주장하자 이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간주되면서 무함마드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생명에 위협까지 받던 무함마드는 당시 야스립(현재 메디나)의 부족장들로부터 초대 되어 신자들과 함께 622년 메디나로 이동하게 된다.
이를 '히즈라'라 칭한다. 이슬람은 '신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뜻이고 이러한 신앙을 믿는 자들을 '무슬림'이라한다.
메디나로 천도한 후 여기에서 처음으로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건설하였기에 히즈라를 이슬람 원년으로 보고 있다. 현재 2018년은 산술적으로는 히즈라 1396년이 되어야하나 실제는 히즈라 1440년(2018년 9월 11일부터)이다.
그 원인은 이슬람에서는 음력을 사용하지만 윤달이 없기에 매년 양력에 비해서 11일씩 짧기에 그간 누적된 날짜들이 이렇게 많은 햇수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함마드는 천도 후 3차례에 걸쳐 메카 군과 전투를 치른 후 630년 메카를 점령하고 이곳을 이슬람 화하였으며 632년 마지막으로 메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이슬람권에서 성지로 추앙받는 메카 (사진=유튜브 캡처/자료사진)
그의 사후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를 칼리프라 칭하며 1대 칼리프는 바크르(632-634). 2대는 우마르(634-644), 3대는 우스만(644-656), 4대는 알리(656-661)이다. 이들 칼리프가 통치하던 시기를 정통칼리프 시대라 칭한다.
이슬람의 분파는 3대 칼리프 우스만이 656년 알살 되면서 시작됐다.
우스만의 암살 직후 알리가 4대 칼리프로 추대되자 우스만의 집안에서는 암살자가 알리와 연관이 있다고 보고 범인을 찾아서 처벌을 해야 된다는 주장이 높아갔다.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는 중에 당시 다마스쿠스의 총독이던 우스만의 사촌인 무아위야 세력과 알리 세력 간에 내전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이슬람의 제1차 내전이라 칭한다.
내전 초기에 알리파가 유리하였으나 무아위야가 형제간에 살육을 중단하고 협상으로 해결하자는 제의를 하면서 알리가 이를 수용했다.
여기에서 이슬람의 첫 분파인 카와리즈(이탈자)파가 형성됐다.
이들은 알리가 칼리프인데 일개 총독인 무아위야와 협상을 하였다는 데에 불만을 품은 그룹이다.
카와리즈파는 칼리프도 지도력과 덕망이 부족하면 교체할 수 있고 노예도 이러한 조건을 갖추면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원론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이탈에 분만을 품은 알리와 이들 간의 갈등으로 알리는 카와리즈파의 자객에 의하여 661년 암살됐다.
현재 오만의 이바디파를 이러한 카와리즈파의 한 분파로 보고 있다.
알리의 사망으로 내전이 종식되면서 무아위야가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야 된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순니파(정통파)가 되었고 패자인 알리를 추종하는 세력을 쉬아(알리를 따르는 세력)라 칭하게 됐다.
역사는 여기에서도 승자가 쓴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쉬아는 소수이고 장기간 순니파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아왔다.
심지어 순니파와 쉬아파의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간의 갈등보다 더 악화되었으며 쉬아파에서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경우 쉬아 정체를 숨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면책권(타키야)도 있었다.
이슬람 제1차 내전 후 중동 지역의 이슬람 세계는 무함마드의 의도와는 달리 왕조시대로 이어지게 됐다.
그 결과 무아위야가 건국한 우마야 왕조, 압바스가 건국한 압바스 왕조 등으로 이어지다가 1258년 몽골에 의하여 압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대대적인 혼란이 있었다.
이슬람권이 전면적으로 와해된 것이다.
장기간의 혼돈의 시기를 거쳐 이슬람 세력이 재규합한 것이 서쪽으로는 순니파인 오스만 제국, 동쪽에서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게 됐다.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1501년 건국되면서 쉬아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이란이 현재까지 쉬아 국가가 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쉬아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를 초전에 멸하고자 2번에 걸친 침략을 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순니와 쉬아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장기간 내재되어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순니/쉬아의 갈등은 1979년 2월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조를 붕괴시키고 이란을 쉬아 최고 성직자(그랜드 아야툴라)가 통치하는 신정 국가로 변모시키면서 시작됐다.
팔레비 통치 기간에 이란은 페르시아 만에서 사우디와 함께 양대 친미국가였다.
그러나 호메이니 혁명 이후 주이란 미국 대사관 직원 인질 사건을 시작으로 반미정책이 시작되면서 미국과 이란은 계속된 적대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또한 호메이니는 쉬아 이슬람 혁명을 전 이슬람 세계에 전파한다는 명목 아래 과격적인 노선을 택하면서 레바논의 헤즈볼라 창설 지원과 수많은 테러, 인질 사건 등에 관여하면서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다.
현재 진행 중인 순니/쉬아 갈등은 사우디와 이란의 패권 투쟁 양상을 띠고 있다.
9/11 테러 (사진=자료사진)
9/11 테러사건 이후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사담 후세인 순니파 정권을 붕괴시키고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그 결과 이라크는 다수를 차지하는 쉬아파(약 60%)가 정권을 차지하게 됐다.
미국은 생각 밖으로 이란에 유리하게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헤즈볼라)을 잇는 쉬아벨트를 형성하여줬다.
이란의 팽창 정책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그러므로 사우디는 날로 증가하는 이란의 지역적 영향력에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는 자국 내의 쉬아파의 반정부 활동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러한 이란의 팽창과 핵개발 의도는 사우디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에 무슨 수를 쓰던 막아야만 하는 최대 관심사이다.
최대 산유국의 한 국가인 사우디가 원전을 건설한다는 의도도 이러한 이란의 핵개발에 대응하기 위한 한 방편이며, 그간 숙적으로 간주하던 이스라엘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도 이란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서로 간의 경쟁 또는 갈등 관계에서 두 국가가 시리아와 예멘의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 저자인 박찬기 전 명지대 교수는 한국중동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주) 메나코르 대표이사로 재직중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