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 세 모녀 같은 시민들이 나오지 않으려면 행정 공무원들을 복지공무원으로 대폭 전환해야합니다. 공무원들의 업무를 바꾸기 위해선 동 주민센터부터 바꿔야겠지요. 주민센터를 리모델링하는 김에 동장실 같은 공간도 줄입시다. 동장들이 주민들 욕구를 파악하려면 집무실이 아닌 현장에 더 오래 머물러 있어야하는 거 아닌가요?"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 뒤인 2014년 7월, 민선 6기 서울시장에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복지 전달 체계의 혁신이라는 공약 이행 구상을 밝히면서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이에따라 서울시는 이듬해인 2015년 80명의 건축가의 재능기부를 받아 80개 동 주민센터에 대한 리모델링에 나섰다. 건축가의 재능기부 역시 ‘기부의 기술’을 너무도 잘 아는 박 시장의 아이디어였다.
다시 태어난 서울의 주민센터들에선 지금 무슨 일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대림2동 주민센터, 중계2·3동 주민센터, 여의2동 주민센터, 장안1동 주민센터 (사진=서울시 제공)
리모델링에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별도로 거쳤다. 다시 2016년에는 185명의 건축가가 협력에 나서 203개 동 주민센터가 추가로 ‘재생’됐다.
그리하여 근사한 카페 같은 주민센터(대림2동), 식물원 같은 주민센터(중계2·3동), 호텔 같은 주민센터(여의 2동), 팬션 같은 주민센터(장안1동) 등 새로운 주민센터가 차례로 문을 열었다. 올해도 주민센터 개선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곳 홍제3동 주민센터를 꼼꼼히 살펴보자.
우선 획일화된 민원실대는 해체했다. 부서 레이아웃도 행정민원팀과 별도로 주민복지팀, 마을복지팀을 추가로 배치했다.
기존 1층 민원실에 있던 동장실은 2층으로 옮겼다. 동장실 면적도 절반 정도(15㎡)로 축소시켰다.
사무실 재편작업 이후 동장부터 집무실을 버리고 현장을 돌기 시작했다. 동장 스스로 주민들을 챙기는 복지 공무원의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다른 공무원들도 자연스럽게 현장 업무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다.
최기훈 동장은 기자와 인터뷰한 지난 27일에도 1만 5천보를 걸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보통 퇴직을 앞둔 동장이 동장실에서 시간 때우는 일이 많았다면 지금은 동네 순찰이 우선이죠. 현장을 걸어 다니며 다니며 행정과 민원을 모니터하는 바람에 제 건강도 많이 좋아졌어요"건물이 바뀌니 직원들의 움직임과 인식도 모두 바뀌었다.
이 건물의 리모델링 디자안에 재능기부로 참여한 경기대학교 천의영 교수 환경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사람이 환경이 만들지만 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이 건조 환경이 조직 구조를 바꿔내기 때문에 기업들의 공간 배치도 과거 위계적인 패턴에서 자율적인 모습으로 바꿔가고 있지요. 공간이 사람들의 창발이나 행위, 참여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동장이 하루 2만보씩 현장탐방, 공무원 업무의 혁신
홍제3동 주민센터 리모델링 전후(상하) 모습. (사진=홍제3동 주민센터 제공)
바뀐 주민센터는 공무원들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민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홍제3동 주민센터의 민원실은 원래는 협소했다. 그러던 곳을 외부 테라스에 커튼 월을 설치해 내부화해 민원실로 재탄생시킨 다음 직원들의 업무 공간과 연결해 놓았다.
활용도가 낮았던 공간이 마을 커뮤니티 중심의 주민공동체 활동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홍삼카페'(홍3동 주민 카페)라는 이름의 개방형 마을카페는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카페를 운영하는데다, 임대료도 없어서 질 좋은 커피를 천원에 공급한다. 주민들은 이 천원짜리 커피를 놓고 수다도 떨고, 독서도 하고, 미팅도 갖는다.
천의영 교수는 리모델링을 하는데 주민들이 누구나 쉽게 와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원칙이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게 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환대 받는 느낌을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오래 머물 수 있어야하고, 그러려면 다시 커피나 책이 있어야 하고 공간도 여유가 있어야 겠지요."주민들이 주민센터에 오래 머물게 되다 보니 주민들끼리의 관계망도 두터워졌고, 주민들과 동사무소 직원들 사이에도 안면이 터졌다.
주민들과 공무원들 사이의 접촉면을 넓히자는 것이 바로 ‘찾동’, 즉 찾아가는 동사무소의 취지다.
기존 동 사무소의 사회복지 인력은 동별로 2~3명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공무원들이 주민들의 처지를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찾동'은 복지플래너, 복지상담전문관, 방문 간호사 등 기존의 복지 담당 인력을 두 배로 늘려 다양한 역할로 주민들을 만난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벼랑 끝에 섰던 어린 부부의 위기 탈출···안암동의 기적
안암동 김에덴 주무관이 ‘찾동’ 사업의 일환으로 동네 어린 부부의 집을 처음 찾았을 때의 모습 (사진=안암동 주민센터 제공)
성북구 안암동 주민센터에서도 2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복지플래너로 일하는 김에덴 주무관은 2015년 여름 혼인신고를 하러 온 젊은 부부와 마주했다.
여성은 아기를 무언가로 둘둘 말아 안고 있었다. 몸에서는 잘 씻지 않은 냄새가 진동했다.
얼마 뒤 김 주무관은 방문간호사와 그 부부의 집을 찾았다. 방문을 열자 집 내부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심지어 아기가 애견용 배변 패드 위에 누워있었다.
다음날 동 주민센터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희망복지팀 통합사례 관리사와 아기건강 사업팀에 연락해 집을 방문해 청소를 해줬다. 아기용품도 새 것으로 제공했다.
알고 보니 이 젊은 부부는 모두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에서 어렵게 자란 탓에 결혼과 육아 준비가 덜 된 채 임신을 하고 말았다. 동 주민센터가 해당 가정에 심혈을 기울여 가자 아이 엄마에게서 마침내 연락이 왔다. “집에서 차 한잔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부부는 신혼부부 임대주책에 당첨돼 이사했고, 지금은 기초생활보장수급자에서도 벗어났다고 한다.
꼭 위기의 가정만이 ‘찾동’의 보살핌의 대상은 아니다.
'찾동'이 그동안 복지 사각지대의 이웃들을 발굴하는 것이 임무였다면, 이제는 '보편방문' 서비스로 전환하고 있다.
'보편방문'이란 단순 복지서비스 지원 뿐 아니라 복지플래너가 주민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마을과 연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0년전 제자도 만나고" 활기 되찾은 어르신···화곡6동의 기적
화곡6동 이병익(우)씨. ‘찾동’ 사업을 통해 초등학교 교사 시절 제자를 만났다. (사진=화곡6동 주민센터 제공)
강서구 화곡 6동에서도 최근 역시 '기적'이 일어났다.
65세가 처음 넘은 어느 어르신이 나오자 그 분(이병익. 65)의 집을 방문해서 건강도 체크해 주고, 65세부터 받을 수 있는 기초연금, 교통카드 등 여러 혜택을 안내해줬다.
이병익 씨는 교사로 퇴직 한 후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그는 방문 직원들에게 사회활동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주민센터 직원은 즉각 마을공동체 사업을 관장하는 '마을계획단'(마을 사업을 스스로 만들고 실행하는 주민단체)을 안내해 그 곳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했다. 그리고는 '마을계획단' 활동 과정에서 오래전 자신이 가르쳤던 초등학교 제자인 윤유선 씨를 우연히 만나기에 이르렀다.
이 씨는 "제 나이에 이런 활동이 없으면 집에서 TV나 보고 있겠죠. 하지만 마을 계획단 활동을 하면서 마을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보람있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 좋아졌습니다"고 활짝 웃어보였다.
안암동의 젊은 엄마나, 화곡6동의 어르신이나 모두 찾아가는 복지에 응답한 주민들이다. 이렇게 지역에서 배려를 받은 주민들이 많다보면, 이들 주민들이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필연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바로 해체됐던 마을이 되살아나는 '마을공동체' 회복의 원리다.
문재인 정부도 서울시의 '찾동' 사업을 전국 읍면동의 혁신 모델로 채택하고 전국화 한다는 계획이다.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민들은 찾아가는 복지를 통해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체감하고 마음의 안도감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찾아가는 동사무소는 마을공동체의 복원의 중추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