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에너지전환 정책역량을 '탈원전'에 집중하면서 대선 공약으로 함께 꼽혔던 '탈석탄' 논의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현재도 곳곳에는 석탄화력발전소가 새로 들어서고 있고 추가로 9기가 더 건립될 예정이다. 값싼 석탄화력에 더욱 중독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석탄화력은 대기와 토양 등에 오염을 일으켜 인류과 지구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중금속 미세먼지, 비산 석탄재, 야간 소음 등에 고스란히 노출된 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경우 대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CBS노컷뉴스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경남 하동 화력발전소 주변 주민들의 피해사례를 소개하고 문제의 발단과 해결해야 할 과제 등을 집중 조명한다.[편집자 주]
[사진] 경남 하동 석탄화력발전소 전경(사진=노컷V 영상 캡처)
경남 하동군 명덕마을 주민들은 지난 20여 년간 석탄재 추정물질과 중금속 초미세먼지부터 일상생활을 어렵게 하는 소음공해까지 겪어오면서 발전소라는 거대기관을 스스로 상대해야 했다.
전문가들은 주변 지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발전소와 주민 사이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횟집아줌마와 퇴직공무원, '투사'된 사연
명덕마을 피해대책위원회 전미경(52) 위원장. (사진=노컷V 인터뷰 영상 캡처)
야간소음과 악취를 견디다 못한 마을 주민 전미경(52) 씨가 막무가내로 발전소에 쫓아간 건 지난 2008년. 새벽 1시쯤 잠에서 깬 뒤 발전소 쪽에서 울리는 '윙윙' 소리에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결국 밤을 새워버린 날이었다.
옥상과 빨랫감에 석탄재로 추정되는 '검은 가루'가 쌓이던 동네에 언젠가부터 연탄가스 같은 냄새까지 퍼지면서 만성 편두통을 앓게 돼 신경이 곤두선 터였다.
이날 발전소 직원이 직접 마을로 나와 소음을 측정하고 악취를 맡아갔지만 돌아온 건 '문제제기하지 말라'는 회유와 협박뿐. 외려 운영하던 횟집에 발전소 직원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전 씨는 생계까지 위협받게 됐다.
'나 몰라라' 하는 발전소에 서러움이 북받친 그는 결국 횟집을 닫고 명덕마을 피해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자처했다. 이제는 카메라와 자체 구입한 소음측정계를 들고 마을 곳곳을 전전하는 게 일상이 됐다.
최근 CBS노컷뉴스 취재진을 만난 전 씨는 "지역 출신 기초의원, 지방자치단체, 국회의원 등 여기저기 숱하게 민원을 제기했는데 다들 들은 척 만 척하더라"면서 "어디 기댈 데가 없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없다'고 결론 내린 발전소 측 연구보고서를 확인하고 너무 화가 났는데 막상 우리는 체계적으로 대응할 만한 자료나 정보가 없어 너무 억울했다"고 밝혔다.
지구촌환경지킴이 하동군지부 이병국(61) 사무장. (사진=노컷V 인터뷰 영상 캡처)
이런 전 씨를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온 건 옆 동네인 금남면 대치마을 주민 이병국(61) 씨. 국세청 회계공무원 출신인 이 씨는 2013년 인근 주민들에 대한 지원금을 지자체가 아닌 중앙부처가 대는 점을 이상하게 여겨 문제제기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발전소와 맞서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적색분자다", "지역을 망치려고 한다"라는 마을 안팎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는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동군 전체, 나아가 전 국민의 일"이라며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전직 공무원의 경험을 살려 발전소 측에 '정보공개'를 청구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올 초 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에 편입해 대기오염 등을 공부하고 있으며 환경단체 지구촌환경지킴이 하동군지부 사무장도 맡았다.
이 씨는 "환경 쪽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 발전소에 맞설 수 없겠다고 생각해서 공부를 시작했다"며 "자식과 주변 분들도 '꼭 밝혀내라'며 이래저래 도와주고 계신다"고 말했다.
◇ "이제는 싸울 것…고통 반복되지 말아야"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1번가 국민인수위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전미경, 이병국 씨(사진=명덕마을 피해대책위 제공)
명덕마을 피해대책위는 지난 6월 청와대와 국민인수위에 발전소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와 이주대책 등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서에는 "주민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기관들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결정에 실망과 허탈감으로 살아갈 희망마저 포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책위는 이어 조만간 마을 회의를 거쳐 기자회견이나 1인시위 등을 열 계획이다.
혈액암 투병중인 주민 도경숙(54) 씨는 "그동안은 우리가 항의하고 해도 발전소는 '어느 집 개가 짖느냐'는 식이어서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것 같았다"면서도 "이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겪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악착스럽게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도경숙(54) 씨(사진=노컷V 인터뷰 영상 캡처)
◇ 당진·영흥의 교훈…"지자체가 나서라"전문가들은 발전소 측이 이제야 조금씩 대화에 응하고 있지만, 이들 사이에 정부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자체 중재로 주민 감시가 활발한 충남 당진이나 인천 영흥발전소 등에서는 이미 발전소와 주민 간 정례화된 협의가 이뤄진 지 오래다.
이를 통해 당진 주민들은 발전소를 운영하는 동서발전 측에 환경현황조사 및 대책수립 등에 관한 용역조사를 협약상 요구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영흥 주민들은 남동발전 측과 함께 환경협정 이행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민·관 공동조사단을 꾸릴 수 있다.
환경운동연합 이지언 에너지기후팀장은 "발전소는 공기업이고 거대한 업체라 주민들이 각자 상대하기 어렵고 장벽이 높은데 이번 사례에는 하동군이나 경남도청의 역할이 빠져 있다"며 "주기적으로 피해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피해를 절감할 수 있는지 소통해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당사자들이 논의할 창구를 지자체가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원자력발전소의 경우에도 주변에 민간환경감시기구를 둬 독립적인 조사권한을 주고 있다"면서 "그러나 석탄화력은 그저 지역 여건에 따라 제각각이니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또 정부가 이런 환경비용을 고려한 탈석탄, 탈원전,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보여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에너지정책전환을 위한 지방정부협의회장을 맡은 제종길 경기 안산시장은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우리는 원전이나 석탄발전으로 인해 사회가 부담하는 환경비용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전기요금을 책정하고 있다"면서 "다양한 외부비용을 충분히 발굴하고 탈원전 탈석탄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구성해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린피스 손민우 기후에너지 캠페이너는 "최근 탈원전이 중요한 에너지 이슈로 논의되고 있지만 11월 독일 본에서 기후변화 당사국총회가 열리고 미세먼지까지 날아들면 석탄이슈는 다시 뜰 것"이라며 "따라서 탈원전 이후 탈석탄까지 큰 틀에서 같이 고려하고 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전환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