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후 한국을 첫 방문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17일 오후 서울 외교부 브리핑 룸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내외신 공동기자회견 중 물을 마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7일부터 3일동안 한중일 3국을 순방할 당시,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미국의 신행정부 출범으로 보호무역주의가 예고되고 대북정책 불투명성 역시 커지면서 큰 혼란이 예고됐다. 아울러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인한 피해가 현실화된데다 소녀상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관계 역시 교착상태였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큼지막한 외교안보 사안을 결정할 컨트롤 타워 부재 상태에 빠진 가운데 악재가 연속으로 겹친터라 '총체적 난국'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내심 기대를 걸었던 것이 바로 틸러슨 장관의 방한이었다. 사드가 미국의 MD체제를 중심으로 동북아에서 한미일 동맹구도를 강화함으로써 중국을 포위, 봉쇄하려는 미국의 노림수란 점을 생각하면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란 여론도 존재했다.
틸러슨 장관은 방한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자회견을 갖고 사드보복을 비판하면서 중국을 압박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바로 하루 뒤 중국을 찾아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만나서는 사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정부의 기대와 달리 되려 한중일 3국 중 우리나라만 만찬 일정을 갖지 않는 등 홀대하는 듯한 모습도 나타났다. 틸러슨 장관은 이후 "한국 정부가 초대하지 않아 만찬을 갖지 않은 것"이라고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혀 우리 정부를 한차례 더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정부의 모습 뒤에 국민들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사드 문제가 '우리' 안보와 관련한 주요 사안이라고 강조해 왔던 그간의 정부 태도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되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여 주도권을 잃은 처량한 처지로 읽혔다.
또 우리나라 영토에 무기를 설치하고 강대국인 중국이 이에 반발하고 나서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지만 외교부나 기재부 등 우리 정부는 처음에는 "(사드보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현실화되자 적극적인 항의를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아사히 신문은 또 틸러슨 장관이 방한 당시 한일관계 조기 개선을 요청했다는 기사를 24일 실었다. 보도에 따르면 틸러슨 장관은 지난 17일 방한 당시 황교안 권한대행을 만나 "최근 한일 관계가 정체돼 유감"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를 두고 현재 한일 갈등 상황과 관련해 일본을 편든 것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또 당사자인 우리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장기화 수순에 접어들었고 미국 측의 이같은 발언으로 인해 우리 외교안보 사안이 미국 동북아 정책의 큰 그림의 일부란 점만 부각되는 결과를 낳았다.
탄핵 인용 이후 과도기 정부에서 외교안보 사안을 두고 대선주자들 간 이견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는 내부 문제마저 아슬아슬해보인다.
야권 차기 대선 주자들은 이미 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대수술을 예고하고 나섰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 조셉 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21일 안희정 충남지사와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을, 22일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 사드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현 정부를 제쳐두고 이미 한국의 차기 대권후보들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탐색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 민간 외교전문가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정부가 과도기 상황에서 무리하게 사드 등 외교안보 정책을 밀어붙였지만 결국 국민들에게 무력한 모습만 보이면서 실망감을 자아내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