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은 여러모로 따져볼 때 불행한 장수였다. 그는 명장의 바탕을 지녔고 조정 정책에 충실한 장수였는데 왜 핍박을 받아야했을까?
명나라는 후금(뒤의 청나라) 정벌 계획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공을 갚으라는 뜻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대륙의 정세를 훤히 꿰고 있던 광해군은 나라의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든지, 왜구가 다시 침입할 조짐이 있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며 원병을 미루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들어 명나라의 원병 요구는 더욱 강경했고 사대은의를 내세우는 조정 대신들의 여론 또한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어 마침내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도원수를 강홍립, 부원수를 김경서로 임명하고 포수 3500명을 중심으로 1만3000명 가량의 군사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후금군에게 패한 뒤 강홍립 부대는 후금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투항하고 말았다. 또 1619년 3월 4일 투항한 다음날에는 후금군과 화의를 맺었고 또 그 다음날에는 누르하치를 만나 조선의 뜻을 전했다.
후금과의 형식적인 전투에서 종사관 김응하 등이 전사하기도 했으나 조선의 주력 부대는 별다른 희생이 없었다. 강홍립·김경서 등은 후금에 억류되었고 그 아래의 장수들은 송환되었다. 이때부터 강홍립은 8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강홍립은 광해군이 은밀하게 당부한 관형향배(觀形向背, 형세를 보아 행동을 결정하는 것)의 전술을 충실하게 구사했다. 그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많은 군사를 살렸으며 전쟁을 방지했다.
이 뜻을 누가 바르게 알아줄 것인가? 이 모든 과정은 광해군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강홍립의 후손들은 온갖 핍박을 받으며 살아야 했고 몰락을 거듭했다.
근래에 시흥 땅 난곡에 있던 그의 무덤을 옮겼는데, 그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그의 한이 서려 있기 때문일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강홍립도 그런 인물의 하나라 하겠다.
출처 ㅣ 왕의 나라 신하의 나라 인물로 읽는 한국사 1(김영사)
※지은이 이이화는 강단 있는 역사학자다. 우리 겨레 고난의 민족사, 백성들의 자취가 짙게 밴 생활사, 압제를 받았던 민중사를 복원하는 글을 주로 써왔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인물을 재평가하는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