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재명 후보가 27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수도권·강원·제주 경선 및 최종 후보자 선출 대회'에서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지지자들이 흔드는 응원봉 사이로 연설을 하는 이재명 대선후보의 얼굴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더불어민주당의 21대 대선 후보로 최종 선출된 이재명 후보는 자타공인 '흙수저'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특정 유력 정치인과의 인연을 발판삼지 않은 채 당권을 거머쥐었고, 대선에도 3번째 도전장을 내밀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어, 이번 조기대선은 '이재명이냐, 아니냐'로 판가름 될 전망이다.
소년공의 '참혹한 어린 시절'…인권변호사 활동하며 정치 입문
1978년 야구 글로브 공장인 '대양실업' 소년공 시절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모습. 이재명 후보 측 제공이 후보의 어린 시절은 '참혹'으로 요약된다. 이 후보 본인도 최근 펴낸 책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서 어린 시절을 기록한 대목의 첫 문장을 "나의 어린 시절은 참혹했다"고 소회했다.
가난한 소년공으로 일하던 도중 팔이 기계에 끼어 장애를 얻기도 했고, 공장에서 약품을 다루다가 후각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1986년에는 사법고시까지 통과했다.
이듬해 사법연수원에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인물을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듣고 인권변호사로서의 꿈을 가지게 됐다. 성남시에서 시민운동가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는 이 때를 대선 후보가 되고자 한 '정치 인생의 시작'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89년 사법연수원 졸업식에서 모친인 고(故) 구호명 여사와 기념 촬영을 하는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이재명 후보 측 제공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 때는 특수공무집행방해 전과를 얻을 정도로 과격했다.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도 활동하는 등 인권변호사 활동에도 나섰던 그는, 2005년 8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현실 정치에 입문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성남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4년을 절치부심한 그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성남시장직을 거머쥐었다.
성남시장직은 비주류에 무명이었던 그의 인지도를 높여준 자리가 됐다. 이 후보는 2010년 7월 악화된 성남시의 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지자체장으로서 매우 생소했던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3년 6개월만에 모라토리엄을 청산하고 청년배당·무상 산후조리·무상교복 지원까지 '3대 무상복지' 사업을 진행하는 능력을 보였는데, 나중에 본인이 간판 공약으로 내세우게 되는 '기본사회'에 대한 여러 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장점이자 단점이던 '사이다'…윤석열에 0.76%p 석패
연합뉴스성남시장 재직 중이던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이 발생하자, 이 후보는 당시 광화문 광장에 모인 시민들 사이에 나가 민주당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정권 퇴진'을 주장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집회가 계속되면서는 이른바 '사이다' 발언으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인지도와 지지세를 얻었다.
이를 발판으로 2017년 조기 대선에 출마했지만, 비주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민주당 경선에서 당시 대세이던 문재인 후보와 안희정 충남도지사에게 밀려 3위에 그쳤다.
이 과정이 뼈아팠던 이유는 열세 극복을 위해 네거티브에 나섰는데, 이로 인해 시작된 친문(친문재인)계와의 갈등이 5년 후인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석패하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대선 경선 패배 후에는 경기도정을 통해 행정 효용성을 입증하는데 주력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이 후보는 계곡·하천 불법시설 철거, 닥터헬기 도입 등 민생 분야에서 여러 성과를 올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민주당내 친명(친이재명)계 최대 모임인 더민주혁신회의가 펴낸 책 '이재명의 준비'에 따르면, 그는 불법시설 철거 뒤에도 몰래 '시찰'을 나가 제대로 이행됐는지를 점검했다고 한다.
2021년 10월 열린 20대 대선 경선에서는 50.29%의 득표율로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를 꺾고 처음으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대장동 개발 관련 의혹 등 여러 논란으로 인한 '비호감' 이미지, 여전히 남아 있던 친문계와의 갈등 등이 발목을 잡으면서 윤석열 후보에게 0.76%p 차이로 석패했다.
당권 거머쥔 뒤 체포동의안 가결…'비명횡사', '일극체제' 논란 낳은 공천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 후 민주당 의원들이 이 대표 자리에 모여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대선 이후에는 리더십의 위기를 맞았다. 3개월 뒤 열린 지방선거의 패배 원인 중 하나로 대선 패배의 후폭풍이 꼽혔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후보 본인이 지방선거와 함께 열린 인천 계양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홀로 살아남은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제기됐다. 다만 이를 발판으로 그 해 8월 열린 전국당원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당권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됐다. 이듬해인 2023년 검찰은 이재명 대표에 대해 대장동 개발 사업과 성남FC 후원금 관련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체포동의안은 부결되었지만 같은 해 9월 검찰은 백현동 용도변경 사건, 위증교사 혐의 등을 적용해 두 번째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번에는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면서 정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윤석열 정권의 폭거에 저항하겠다며 단식투쟁을 진행하던 이 대표는 지팡이를 짚은 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했고,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가까스로 구속 위기를 면했다.
2024년 1월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왼쪽 목 부위를 습격당해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모습. 연합뉴스
2024년 1월엔 부산을 찾은 자리에서 흉기에 목을 찔리는 피습을 당했다. 칼날이 경동맥이 아닌 경정맥을 향하면서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후에 그는 독해졌다.
2024년 22대 총선을 위한 민주당 공천은 이른바 '비명횡사' 논란을 빚을 만큼 친명계가 대거 공천장을 받았다. '이재명 일극 체제'라고 불리는 등 지나친 공천이 아니었냐는 비판이 일었다. 일각에선 지나친 독선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민주당 단독으로 171석을 얻으면서 이를 일축했다. 같은 해 8월 열리는 전국당원대회에서 당 대표 재선에 도전했다. 대선을 앞두고 당 대표를 맡은 일로 인해 역효과를 거둔 인사들이 여럿 있던 탓에 당 안팎에서는 우려가 제기됐다.
특히 사법리스크 또한 적지 않았기에 대표직을 '방탄'으로 활용한다는 비판마저 제기됐다. 지난해 위증교사 혐의 1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가장 큰 관심사이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지난해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지난 3월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 받으며 위기를 넘겼다.
12.3 내란 사태, 직접 '유튜브 방송'…계엄군 막고 대선 후보 선출
이재명 대표 유튜브 라이브 방송 캡처윤석열 대통령이 12.3 내란 사태를 일으키면서, 계엄군의 '체포 대상' 1순위였던 이 후보의 행보도 주목을 받게 됐다. 그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서 국회로 향하는 길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켜, 시민들에게 국회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당 소속 의원들에게도 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을 위해 국회로 올 것을 지시했다.
오래지 않아 국회 앞에 시민들이 모여들어 계엄군과 대치했고, 결과적으로 군 병력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진입하는 데 실패하면서 2시간여만에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됐다. 직후 민주당은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당론으로 결정했고, 12월 14일 본회의에서 국민의힘 일부가 돌아서면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이후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의 탄핵을 만장일치로 인용하면서 이 후보는 본격적인 대선 재도전 가도에 나섰다. 그리고 27일 치러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89.77%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본선 후보로 선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