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5일 오후 제주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퇴임 후 거취에는 입을 닫았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임기 7개월여를 남기고 대권 출마설과 관련, 어느 때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25일 방한한 반 총장은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중견언론인들과의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내년 1월 1일이 되면 한국 사람이 되니까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그때 가서 고민하고 결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선 출마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질문에 "솔직히 말하면 내가 대통령을 한다는 것은 예전에 생각해본 일도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여전히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화법이다.
반 총장은 "아무튼 그런 것(출마설)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했으니 기대가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겠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낮은 평가나 비판적 견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항변했고 틈틈이 자기 홍보도 빼놓지 않았다.
정통 관료로 잔뼈가 굵은 반 총장의 기존 이미지와는 크게 달라진 것으로 오히려 정치인의 언행에 가까웠다.
그는 "제 전임자들보다 (일이) 몇 배 늘어난 것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그렇다 보니 여러가지 얘기도 나오고 국제사회가 느끼는 좌절도 많은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10년 간을 마라톤을 해야 하는데 100미터 뛰는 기분으로 계속 뛰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반 총장을 '역대 최악의 총장 중 한 명'이라 혹평하는 등 최근 외신들의 잇단 비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은 또 '존재감 없는 사람'(nowhere man)이나 강대국에 '고분고분한'(pliable) 인물 등의 비평을 의식한 듯 "나는 가능한 약자 편에 서서 독재자들에게 쓴소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강대국의 반대에도 미얀마 민주화의 길을 연 것이나 이란 핵 해법에 대한 반대를 무릅쓰고 협상을 통해 해결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자신의 공이 적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는 북한 핵과 관련해서도 "왜 북핵 문제를 해결 못했느냐, 북에 가지 못했느냐는 말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세계에 2개 남은 분단국가 가운데 사이프러스 문제는 유엔 안보리가 자신에게 해결을 위임한 반면 북한 문제는 아직 위임받지 못한 현실의 한계를 이유로 들었다.
다만 "그럼에도 (유엔) 사무총장 개인의 이니셔티브를 갖고 북측과 계속 대화해왔다"며 "계속 고위 간에 대화채널을 열고 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그는 "남북간 대화채널을 유지해온 것은 제가 유일한 게 아닌가 생각되며 기회가 되면 계속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연말까지 남은 임기 동안에도 북한 방문을 계속 추진할 뜻을 내비친 셈으로, 만약 성사된다면 전방위적인 메가톤급 파장이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반 총장은 북핵 해법에 대해 "대북 압박을 계속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인도적 문제를 통해 물꼬를 터가며 대화하고 긴장을 완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이는 제재·압박 일변도의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과는 다른 것으로, 대권 행보를 위한 정책적 차별화를 시작한 것이란 관측을 낳게 한다.
반 총장은 1980년대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향 보고 사실이 최근 외교문서 공개를 통해 밝혀진 것과 관련해서는 "언론 비판 기사를 보면서 기가 막힌다"며 발끈했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반 총장의 이런 반응은 이례적이며 낯설기까지 한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호남지역에서 여전히 막강함을 감안, 격한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화근을 미리 잘라내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반 총장은 현재 만 71세의 나이가 대권 주자로서 핸디캡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몇십년 전의 자연수명과 현 시대의 자연수명은 15~20년이나 차이가 있고, 미국 대통령 후보들도 70세 넘은 경우가 많다는 것 등의 논리다.
반 총장은 "나는 10년 동안 마라톤을 100미터 뛰듯이 했는데 역대 어떤 사무총장도 저보다 열심히 한 사람은 없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