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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941년의 저주'에 걸려든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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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항일운동에 나서다 변절, 친일행각에 적극 가담

해촌 김용주는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애국·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다가 태평양전쟁의 전초였던 1941년 이후 변절하여 일본의 대동아공영에 열성적인 친일분자가 됐다. 김무성 현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이 4년 전 중국에 선전포고를 한 데 이어 미국과의 전쟁에 나선 것이다.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일본제국 앞에 조선의 백성들은 기가 죽었다.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30여 년의 긴 세월을 일본 식민지 아래서 살아온 백성들은 조국의 독립은 이제 '물 건너간 것'이라고 절망했다. 일본이 미국과 맞붙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무슨 수로 독립할 수 있단 말인가. 조국의 독립은 다 끝난 일이라고 체념했고 그런 공감대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항일운동 전선에 있던 많은 독립운동가와 지식인, 기업가들의 신념도 이 즈음 흔들렸다. 1941년을 전후로 '항일'과 '친일'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이다. 목숨 걸고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때 변절하고 만다. 일본은 난공불락의 동아시아 유일의 제국이자 아시아대공영(大東亞共榮)의 중심국가로 번영할 것이라는 망령 혹은 환상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1941년의 저주'에 걸려든 인물 가운데 하나가 춘원 이광수다. 우리나라 대표적 지식인이자 당대 최고의 소설가였던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대륙을 점령해 나가자 흔들렸던 건지도 모른다. 섬나라 일본이 황제의 나라 중국을 향해 호령하는 것을 보고, 예술가다운 명민함으로 깊은 절망과 미래 청사진을 동시에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전선이 확대되자 사라진 조국을 향한 절개를 슬그머니 내려놓은 것 같다.

이때 항일독립투사와 양심적 애국인사 대부분이 변절하거나 친일로 돌아선다. 일본의 무시무시한 군사력과 힘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운명은 끝났다고 확신한 것이다. 불사조 같은 일본이 불과 4년 뒤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1941년의 저주'에 걸려들었다. 그는 애국자이기도 하지만 친일행각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1941년 이전까지 김용주는 애국자요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한 기업인이었다. 1927년 항일단체였던 신간회 영일지회 설립총회 멤버였고, 1925년에는 야학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1936년에는 항일운동 본거지였던 포항 영흥학교가 존폐 위기에 처하자 사재를 기부해 학교를 살렸다. 1938년에는 경북도의회에서 일제의 '강제면작' 정책으로 피해를 본 농민들에게 국가가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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