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희 씨(CJ제공)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84) 전 제일비료 회장이 14일 중국에서 지병인 암으로 타계했다.
그는 대한민국 제 1의 재벌가 맏아들로 태어나 한때 선택받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 지위 때문에 삼성의 창업주인 아버지 이병철 선대회장과의 갈등을 겪고 후반부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비운을 경험했다.
1931년 경남 의령에서 이병철 전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대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한 뒤 귀국해 1960년 중반 본격적으로 삼성가의 경영일선에 뛰어든다. 그의 첫 직장은 안국화재였고 64년 65년에 걸쳐 온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밀수사건이 터지고 그 여파로 이병철 회장이 경영 2선으로 물러나면서 이맹희 전 회장은 삼성그룹을 7년동안 전면에 서서 이끌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삼성은 내가 3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정열을 불태운 곳이다. 척박한 정치와 경제 풍토 속에서 나는 이 삼성이라는 기업에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 그리고 젊은 오기와 욕심을 모두 쏟아 부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당시 그가 가졌던 부사장 직함만 17개였다고 하니 이병철 회장이 장남을 확실한 후계자로 생각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맹희 전 회장은 당시 매일 같이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 아침식사를 함께한 뒤 아버지와 한 차로 출근한 것은 물론이고 그룹의 크고 작은 일을 놓고 늘 의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으로 장기집권의 토대가 마련된 뒤 박정희 정권과 삼성 사이에도 화해분위기가 조성됐고 이 기회를 타서 이병철 전 회장은 경영일선으로 복귀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맹희 전 회장은 이런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그는 그룹의 전면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 자전적 저서 '묻어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로서는 당신이 돌아오고자 하는데 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비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게 실책이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삼성가 2세 승계의 물꼬를 결정적으로 돌려놓고 아버지와 자식으로의 인연에도 커다란 금이 갔던 사건은 차남인 창희씨의 '모반사건'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69년 이맹희 전 회장이 필립스와의 합작문제로 독일 출장길에 오른 사이 동생은 '사직당국이 이병철 회장을 조사해야 한다'는 취지의 문건을 작성해 당시 권부 핵심에 탄원서 형식으로 제출했다고 한다.
동생에 의해 비롯된 일이었지만 형인 이맹희 전 회장도 의심을 사게 되면서 부자관계가 틀어지게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이병철 회장은 전면으로 복귀했고 이맹희 전 회장은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제일제당의 부사장 자리만 유지한 채 사실상 경영일선에 물러나게 된다. 이 전 회장은 "자신은 결단코 그 일과는 무관했다"고 밝혔다.
이맹희 전 회장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놓은 뒤 지방으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전전하는 생활을 하게 됐고 끝내 화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삼성그룹의 경영권은 1976년 3남인 이건희 회장에게로 넘어가게 됐다.
1994년 부인 손복남 당시 안국화재 상무가 안국화재 지분을 이건희 회장의 제일제당 주식과 맞교환하면서 제일제당이 삼성에서 계열분리돼 오늘날 CJ그룹의 모태가 됐다. 이맹희 전 회장은 경영 일선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이맹희 전 회장은 삼성가의 장자지만 장자로서 대권을 승계하지 못했고 말년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송사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지난 2012년 2월 아버지가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을 이건희 회장이 몰래 단독 명의로 변경했다며 7천억원대의 소송을 냈지만 1,2심에 패소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조만간 항공편으로 서울에 운구될 예정이며 장례식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