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설' 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한편으로는 명절이라 더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 노숙인과 독거노인 등 소외된 우리 이웃들에게 명절 날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보다는 외로움과 바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가긴 어딜 가요…이 꼬라지로 고향에 갈 수도 없고…손가락질만 당하지"
설 연휴를 앞둔 지난 8일 서울 영등포역 앞. 한 손에는 목발을, 한 손에 선물용 김 세트를 든 윤 모(51)씨는 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 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윤 씨는 오랜 노숙 생활에 피부가 두터워진 탓인지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인근 쉼터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지하철역이나 교회를 떠돌면서 근근히 끼니를 때우는 윤 씨는 노숙 생활만 벌써 14년째. 설날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설 당일을 제외한 나머지 연휴 동안은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교회도 쉬는 경우가 많아 윤 씨에게는 설이 반갑지만은 않다. 대부분이 풍요롭게 지내는 명절에 윤 씨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만 한다.
윤 씨는 손에 들고 있던 김 상자를 원망한다. "한 단체에서 설 선물로 줬는데 밥 없이 먹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줄 사람도 없고…" 어느새 윤 씨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윤 씨는 이럴 때면 한 살 나이를 더 먹었을 딸 생각이 간절하다. "가족이 너무 보고 싶다. 딸 하나 있는데 벌써 16살이다. 몸을 다치면서 가정이 파괴됐고 아내에게 식당 차려주고 딸을 맡겼다. 그래도 시집가는 모습은 봐야할텐데…" 고개를 떨군 윤 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빛 하나 제대로 들지 않아 냉기로 가득한 영등포 쪽방촌에 사는 이 모(71)씨 역시 설날은 외롭기만 한 날이다.
외풍이 심해 집 안에서도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어야하는 이 씨. 설 한파가 매서울수록 사람의 온기가 더욱 그립기만 하다.
사업실패와 연이은 도박 탓에 결국 가족들이 모두 자신을 떠났고 우여곡절 끝에 이 씨는 7년 전 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 곳에 겨우 들어왔다. 하루 하루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이 씨의 시름은 명절이 되면 더욱 깊어진다.
이 씨는 "애들이 보고 싶다. 아들과 딸이 지금쯤이면 자식을 낳았을 거다. 기 전에 손자, 손녀들을 볼 수 있을까"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이 씨의 가슴이 미어진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다지아나(33)씨는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6년이 넘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5살짜리 아들도 뒀지만 지금까지 고국에 다녀온 횟수는 겨우 두 번.
아직 언어는 물론 한국 문화에도 익숙지 못한데다 물가가 비싼 한국에서 다문화가정 주부가 설 명절을 준비하려고 하니 그저 눈 앞이 캄캄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어려움을 마땅히 털어놓을 곳도 없다.
게다가 한국에서 떠들썩한 명절을 보낼 때마다 고국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이 눈에 밟힌다.
다지아나씨는 "조금씩 한국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가족들 사진을 보면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일수록 오히려 더 외로운 사람들. 이들에게 새해를 여는 설날은 그 어느때보다 외롭고 쓸쓸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