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만주를 장악했던 1930∼40년대에 중국인을 가장해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여배우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가 사망했다. 향년 94세.
14일 유족에 따르면 야마구치는 지난 7일 일본 도쿄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졌다.
1920년 일본인 양친에게서 태어나 중국 만주에서 자란 야마구치는 13세 때 부친의 중국인 친구에게 입양돼 '리샹란'이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는 이후 중국 이름을 쓰면서 '지나의 밤' 등 일본이 중국인을 겨냥해 제작한 선전영화에 잇따라 출연, 큰 인기를 얻었다.
중화권 인기가수 덩리쥔(鄧麗君)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 '야래향'도 당시 야마구치가 동명의 영화에 출연하며 부른 주제곡이다.
일본인 신분을 숨기고 중국인으로 살았던 야마구치는 전후 부역죄로 재판에 넘겨져 사형에 처해질 뻔했다가 일본인이라고 해명해 추방됐다. 이후 중국에서는 야마구치의 노래가 금지됐다.
야마구치는 일본으로 돌아와 본명으로 활동을 재개했으며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추문'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구가했다.
1950년대에는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새뮤얼 풀러 감독의 '대나무집'을 비롯한 미국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1년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와 결혼했다가 4년 뒤 헤어지고 1958년 외교관 히로시 오타카와 결혼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1969년 TV 토크쇼 진행자로 복귀한 뒤 정계에 진출해 1974년부터 1992년까지는 자민당 참의원을 지냈다.
야마구치는 1987년 자서전을 내고 과거 선전영화에 출연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