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의 인터뷰' 이상화가 12일(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한국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소치=임종률 기자)
소치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빙속 여제' 이상화(25, 서울시청)의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소치 아들레르 아레나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한국 관중은 물론 취재진까지 박수와 함성으로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이상화도 태극기를 들고 자신의 금빛 레이스가 펼쳐진 얼음판을 다시 돌며 관중석의 환호에 화답했습니다. 기자석 가장 앞쪽에 앉았던 저 역시 다른 기자들과 손을 흔들며 축하해줬는데 한국 취재진을 알아본 이상화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군요. 여제의 인사에 황송해 하며 서둘러 취재진도 답례를 했습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의 뿌듯함. 시상식 때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울컥 밀려오는 가슴 속의 무엇인가. 그토록 친숙하지만 이역만리 러시아 땅, 또 그 역사의 현장에서 듣는 선율의 감동, 그 무게감은 TV 중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도 기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쁨을 나눴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장, 단거리 간판 이승훈과 모태범(이상 대한항공)은 물론 쇼트트랙 남자 1500m까지 모두 메달이 무산되면서 3회 연속 톱10에 노란불이 켜진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상화까지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경기를 보던 저 역시 두근두근하더군요. 워낙 올가 파트쿨리나의 기세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파트쿨리나는 2차 레이스를 37초49로 끊어 1차까지 합계 76초06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이상화가 1차에서 37초42로 마치긴 했지만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 여기에 러시아 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도 더욱 부담감을 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화는 속 시원한 레이스를 펼치며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습니다. 37초28, 가장 빠른 기록으로 파트쿨리나를 0.36초 차로 제쳤습니다. 500m(37초30)와 합계(74초75) 올림픽 기록을 12년 만에 한꺼번에 갈아치운 역주였습니다.
▲"한번 금메달 따봤더니 굉장히 무덤덤한데요?"
긴장 속에 경기를 지켜본 한국 취재진은 모두 홀가분한 마음으로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으로 내려갔습니다. 벽면 TV에서 나오는 이상화의 경기 모습과 시상식 장면 등 하이라이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인터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 만에 나온 이상화에게 소감을 묻자 첫 마디는 "굉장히 무덤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밴쿠버올림픽 때 이미 금메달을 한번 경험해서라는 겁니다. 경기 직후 감격적인 표정과 시상대에 오를 때 울먹거리는 얼굴 등을 지켜본 취재진으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견 이해도 가는 대목입니다. 보통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많게는 4번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경기 직후 현장에서 중계 방송사의 플래시 인터뷰를 시작으로 믹스트존에서 TV 취재진을 거친 뒤 비로소 신문, 라디오 기자들과 만납니다. 이후 기자회견장에서 전 세계 취재진을 대상으로 공식 인터뷰를 소화합니다.
이미 앞선 두 번의 인터뷰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쏟아내고 온 만큼 세 번째 인터뷰는 다소 차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마인드 컨트롤이 철저하기로 이름난 이상화라면 더욱 그럴 겁니다.
▲"잠깐만요, TV 좀 보고 가실게요"하지만 그 가슴 벅찬 느낌이 쉽게 사라질 수 있나요. 곧바로 이상화는 "운 것 같다"는 말에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경기 결과를 보면 감동이 밀려와서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고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놨습니다.
올림픽 2연패, 오르기보다 어려운 정상 지키기라 더 기뻤습니다.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는 이상화는 "올림픽 기록을 깬지 몰랐고, 2연패를 이룰 수 있을까 의문이 굉장히 많이 들었는데 기분 굉장히 좋고 너무 좋아요"라며 수줍은 듯 웃었습니다.
이어 제가 친구인 모태범과 이승훈에 관해 물으려 하자 이상화는 "잠깐만요, TV 좀" 하더니 질문을 끊었습니다. 그러더니 까치발로 서며 고개를 들더니 취재진의 뒤쪽 벽면의 TV를 보는 겁니다. 기자들도 돌아보니 마침 이상화가 시상대에 올라 손을 흔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저기 나오는구나" 하는 이상화의 말에 모두들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언제 봐도 기분좋을 장면. 더군다나 이상화 본인은 아직 이 벅찬 순간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터였습니다. 때문에 인터뷰를 다급하게 끊고서라도 꼭 보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의 시상 장면을 확인한 이상화는 그제서야 다시 인터뷰를 이어갔습니다.
▲물이 차는 무릎을 부여잡고 이뤄낸 값진 결실
'아! 무릎이 또' 이상화는 훈련 도중 웃는 모습을 보이는 때가 드뭅니다. 대부분 다른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치 않은 몸과 혹독한 훈련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자료사진=송은석 기자)
이상화는 "1차 레이스가 끝나고 2차를 준비하며 자전거를 타는 동안 해왔던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지면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경기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눈물이. "아무리 떨려도 본 경기에 들어가면 안정을 찾는다"는 이상화의 강심장도, 그것도 경기 중에 울려버린 고된 과정이었던 겁니다.
새벽 4~5시부터 시작되는 태릉의 혹독한 일상은 이미 잘 알려진 터. 올림픽만 다가오면 화면을 통해 숱하게 나와 어쩌면 우리는 이들의 훈련에 내성이 생긴 건지도 모릅니다. 선수들이 죽을 만큼 훈련하는 것은 똑같은데 아니 시간이 갈수록 치열한 경쟁에 강도는 더 높아질 텐데 '그저 훈련을 하는구나' 이상화의 인터뷰 첫 마디처럼 '무덤덤하게' 넘겼는지도 모릅니다.
이상화는 몸도 성치 않았습니다. 왼무릎이 아팠습니다. 딱딱한 스케이트날로 더 딱딱한 얼음판을 힘차게 지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상화는 "굉장히 좋지 않게 된 지 오래 됐다"면서 "무리하면 물이 차고 아파서 주사를 맞고 재활을 병행해왔다"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여름에 주사를 맞고 그걸로 버텨왔다"고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또 부담감에 짓눌릴 때마다 이상화는 스스로 주문을 외웠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임하라"라고 마음 속으로 외쳤답니다. "이까짓 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되뇌이면서 경기를 했다"고 합니다.
무릎에 물이 차는데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주사를 맞고 버틴다고요? (사실 어젯밤 이상화의 말을 들을 때는 그냥 들어넘겼는데 이 기사를 쓰면서 다시 인터뷰 내용을 돌아보니 저도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요.)
사실 인터뷰 도중 질문이 중간에 끊기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전화기가 울린다거나 질문 내용이 잘 전달되지 못했을 때, 또 선수가 감정이 북받쳐 울음이 터질 때 정도일 겁니다. 또 취재진의 마감 시간이란 항상 급하기 마련이라 대부분 인터뷰는 신속하게 이뤄집니다.
하지만 이상화와 같은 경우라면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그토록 노력을 해왔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인간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4년의 세월을 땀으로 적셔왔기에, 마땅히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