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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피해자 "고문 없었다고? 파렴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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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의 한 피해자가, 당시 수사검사였던 고영주 변호사가 최근 보수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문사실을 부인한데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경남CBS <시사포커스 경남="">(제작 손성경 PD)과의 대담 전문.

■ 방송 : FM 106.9MH (17:05~17:30)
■ 진행 : 김효영 경남CBS 보도팀장 (이하 김)
■ 대담 : 고호석 씨 (이하 고)

김>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습니다. 고호석씨와 만나봅니다. 안녕하십니까?

고>네 안녕하십니까

김>묘역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뭐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고> 두가지죠. 일단은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김>고맙습니다는 알겠어요. 어려운 변호를 맡아주셨으니까요. 죄송합니다는 어떤 마음때문에 그랬습니까?

고>저희들 사건을 맡으시면서 이런저런 고생들이 참 많으셨던게 저희들은 사실 그 당시 구속돼있었고 구속되기 전에 엄청난 고문과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변호사님이 저희들때문에 신분상의 위협이라든지 아이들에 대한 협박이라든지 이런 것을 겪을거라고 별로 생각을 안했구요. 인간적 고뇌가 많았을텐데 그것을 헤아릴겨를이 저희한테 없었죠.

그래서 그냥 편하게 대했고 그 이후에도 쭉 같이 지내면서도 사건들 담당하신 것 때문에 고맙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그렇게 미안하다는 생각은 잘 못했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생생하게 느꼈고 그래서 오늘 참배하면서 죄송합니다. 고마운 점도 잘 모르고 고생하신 것도 못느꼈던 것에 대해서 사죄를 했죠.

김>인간 노무현이 겪었을 그런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셨던 거군요.

고>네

김>노 전 대통령과는 가끔 만나셨나요?

고>저희들이 출소하고 나서는 제가 이런저런 단체에서 실무를 맡아서 일 해왔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 종종 볼 기회가 있었고, 사적인 술자리에서도 자주 만났었습니다. 정치권으로 가시기 전까지요.

김>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온 이후로는요?

고>한번 뵜죠.

김>돌아가신 이후에는 오늘이 처음입니까?

고>부림사건 관련자들이 같이 온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김>영화 <변호인>때문에 뭉치시게 된건가요?

고>새삼스럽게 저희 관련자들이 전부 "아 참 그때 힘드셨겠구나" 다시 알게 되고, 이것을 자기 마음속에만 묻어둘게 아니라 직접 찾아뵙고 묘역 참배를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그 당시 같이 고생을 하셨던 여사님에게도 그런 말씀을 한번 드려야하지 않겠냐 얘기를 했구요. 상당히 급격하게 의견이 모아져서 그래서 한번 가자해서 왔죠.

김>권양숙 여사님도 만나셨습니까?

고>네 그렇습니다.

김>어떤 말씀을 해주시던가요?

고>일단은 대단히 반가워해주셨구요. 그 당시에 고생많이 하셨다고 고맙다고, 죄송하는 말씀은 드렸는데 고맙다는 말씀은 그럴 수 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마라 그 사건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새로운 인생길을 찾았고 열심히 사셨으니까 미안할 것은 없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희의 사건 전 후의 이런저런 사적인 소회를 나눴습니다.

김>당시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고 선생님은 당시에 어떤 직업을 가지셨고, 어떤 혐의로 끌려가셨습니까?

고>제가 당시에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구요. 저희들이 갈 때는 왜 잡혀갔는지도 사실은 몰랐습니다.

제가 물론 70년대에 학생운동이라는 것을 할려고 노력은 했지만, 70년대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처럼 학생운동이라는게 시위를 한다거나 조직을 만든다거나 이런게 아니었거든요. 70년대 상황자체가 암울했고, 어떻게 정권이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말 한마디, 비판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뭔가 답이 있어야하는게 아니냐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해서 그래서 책도 열심히 보고 같이 토론도 하고 있었던 거구요.

물론 제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 79년 4월에 부마항쟁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데모도 열심히 했죠. 그 외에는 대학4년 다니면서 데모도 못해보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나면서 제가 공안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어요.

왜냐하면 그 전에 학교안에 들어와있던 정보기관에 제가 반정부적인 색깔을 가진 인물로 찍혀있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가졌거나, 그런식으로 정보기관에 찍혀있던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을 여러차레 걸쳐서 끌고가서 두들겨 패고, 그 중에서 얼기설기 묶어서 만든거구요.

저희들이 끌려갈때는 왜 조차도 끌려가는지 몰랐어요. 대공분실인 것도 아주 나중에 알았죠. 끌려가서 계속 얻어맞으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딱 하나였어요.

너희들은 공산주의자고, 정부를 전복해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했다. 그것을 자백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얘기할 수 있어요.

안하니까 계속 두들겨 패고 고문하고 그랬던 거구요.

김>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

고>예. 핵심은 공산주의자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여서 저희들이 이 사회를 끌어 엎으려고 생각했다. 이게 자기들이 요구하는 핵심이에요.

그러면 공소사실은 크게 두가지에요.

하나는 책을 봤다. 또 하나는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무슨 얘기든지 간에 끝에가서 저들이 요구하는 것은 반국가단체를 이롭게할 행동을 하고 또는 북에 공산주의를 이롭게 할 무엇을 하고 이런식으로만 묻기 때문에 자기들이 요구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죠.

그것말고는 일주일 얻어맞으면서도 왜 얻어맞는지 조차 몰랐어요.

자기들 와서 처음부터 인생을 다시써라 이런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가니까 '너 김일성 지령받았지?' ' 예? ' 하면 두들겨패고 '김대중 지시로 뭐 어떻게 했지?' '말도 안됩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이러면 두들겨패고 그래서 결국 만들어낸 것은 저희들이 술집에서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고 정부비판한거 아이 돌잔치에 모여 앉아서 얘기한거 끌어내서 맨 마지막에 하여튼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어떻게 하고 책읽고 토론하면서 얘기했던 것도 정부를 비판하는 등 공산주의 건설을 하기 위한 것 이런식이었던 것이죠.

김>그래서 며칠동안 구금 당하셨던거에요?

고>만 36일이요.

김>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던 것은 언제였습니까?

고>만 36일은 대공분실에 잡혀있었으니까 아무도 못만났구요. 구속영장이 9월 7일날 떨어져서 구치소로 넘어가고 나서 20일 동안은 아무도 못만나게 했어요.

저희들이 노 변호사님을 만난 것은 잡혀들어가고 두 달 정도 지난 후였습니다.

김>그 때 노 변호사를 만났을 때 기억이 나십니까? 어땠습니까?

고>노 변호사님은 사실 인권변호사가 그 당시 아니었구요. 인권변호사로 계셨던 김광일 변호사님이 경찰에서 묶어넣는다고 하니까. 변호사로서 저희를 변론할 수 없어서 노무현 변호사한테 개인적인 인연으로 이 사건을 맡아달라. 인간적인 선의로 저희 사건을 맡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뵜을 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투가 아니더라구요.

그냥 아 젊은 친구들이 치기로 설치다가 잡혀들어왔구나. 그래서 내가 좋은 마음으로 변론이나 해주자. 이런 정도 생각이셨구요.

저희 만나보니까 뭐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야 하는데 전혀 그게 아니고, 삼십몇일 심하면 60일까지 불법감금돼 있었고, 온통 고문을 당해서 엉망진창이 되있는걸 보면서 충격을 받으시는 것 같더라구요.

1차로 거기서 내가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판사도 하고 변호인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대한민국 법이라는게 이게 뭐야? 이런데서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구요.

둘째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책읽었다는 거하고 얘기나눴다는 것이 공소사실이 전부에요.

그래서 이 친구들이 읽은책이 뭐야 하면서 책을 좀 읽으셨어요. 읽어보니까 왜 이게 불법. 푸른도서야 말도 안된다. 책들의 내용을 쭉 보시면서 이것은 진짜조작이구나 그 뒤에는 저희를 대하는게 진지하게 바뀌셨죠.

김>최근에 일부 보수언론에서 당시 수사검사 고영주 변호사죠. 이분과 인터뷰하면서 영화속에 나오는 이야기는 엉터리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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