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 기자/자료사진)
“에어컨 설치하면서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데 갑(甲)의 입장에선 그게 용납이 안 된다는 거죠.”
8년째 에어컨 설치기사로 일해온 김 모(33) 씨는 지난해부터 같이 일해오던 대기업 하청업체로부터 최근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에어컨을 설치하다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고객과 말다툼이 붙었고, 이를 문제 삼은 에어컨 설치 업체 사장이 "다른 데 알아보라"며 계약을 해지한 것.
김 씨는 "해당 에어컨은 새로 나온 모델이라 이에 대한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였다"며 일방적 해지에 억울해했다.
김 씨는 그나마 자신의 실수가 있긴 했지만, 제조나 운송 과정에서 하자가 발생하더라도 그 책임의 화살이 설치기사에게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비자와 최종적으로 만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고객 불만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개인사업자 신분이다 보니, 어디 마땅히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다. 여러 대기업은 물론, 이들로부터 설치 하청을 받는 중소업체까지 다수의 '갑'들과 일하다 보니 눈치만 쌓여간다는 얘기다.
가전제품 설치기사들은 "설치한 제품에 하자가 생기는 게 가장 두렵다"고 입을 모았다.
설치한 제품에 흠집이 나거나 변색하는 등의 하자만 생겨도 기사들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8년째 가전제품 설치를 해온 김 모(31) 씨는 “보험 처리가 안 될 때가 많다, 기사 잘못이 아닌데도 기사한테 다 책임을 전가하는 부분도 있다”고 입을 열었다.
김 씨는 “설치하고 나서 한 달이든 얼마 안 돼서 고장이 나거나 기스가 나면 그 제품에 해당하는 가격을 주고 기사가 그 제품을 되사는 식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가전제품의 특성상 한 대당 가격이 수백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만큼, 기사들 처지에선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설치기사들이 통상 받는 설치비는 벽걸이 에어컨 5만 원, 스탠드 에어컨은 7만 원, 냉장고는 3만 5천 원, TV는 4만 원 정도이다.
여름철 에어컨 주문이 몰릴 땐 그만큼 수익도 늘지만, 평균을 내보면 사실상 한 달 200만 원 정도 벌기도 빠듯한 형편이다.
김포에서 8년째 에어컨 설치를 해온 이 모(36) 씨는 "최근 한 동료가 제품 배상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커 일을 그만뒀다"며 “냉장고 가전 기사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기사들끼리 돌아가면서 나눠서 돈을 낸다더라”고 전했다.
고객들의 제품 전반에 대한 만족도를 평가하는 ‘해피콜’도 가전제품 설치기사들이 지적하는 ‘갑의 횡포’ 중 하나다.
최고 점수인 ‘매우 만족’ 등급을 받지 않으면 벌금을 내거나 배차를 줄이는 등의 페널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씨는 “오늘도 ‘만족’ 하나가 떠서 벌금 만 원을 냈다”며 “무조건 매우 만족이어야 한다. 만족이라는 건 점수가 아예 없고 매우 만족만 백 점”이라고 했다.
고객이 ‘매우 만족’하지 않고 그저 ‘만족’에 머무는 평가를 하면, 기사들의 일감은 떨어지고 배차 거리는 길어진다.
대전의 설치기사 김 씨는 "해피콜은 처음 구매 당시부터 전반적인 걸 다 토대로 하기 때문에 매장 구입도 전부 우리 점수로 들어간다”며 “나중에 보면 정말 내 잘못이 아닌데도 페널티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고 억울해했다.
설치기사들은 또 "해당 제품 제조사의 로고가 박힌 조끼나 티셔츠 같은 유니폼도 자비로 사야 한다"며 "부당한 점을 따지자면 한두 개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또다른 설치기사는 "먹고 살려면 다 이렇지 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을의 분노'를 꾹꾹 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