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순이' 스틸컷이름 김공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마을 이장이 지어준 이름이다.
"(고향이)고흥. 고흥, 고흥, 고응, 고응, 공, 공, 공. 여자니까 순이라 혀라. 공순이." 8살에야 얻은 이름, 그녀는 운명처럼 '김공순'이 되었다.
'엄마가 아닌 엄마'가 된 CODA
영화 '공순이' 스틸컷김공순은 CODA(Child Of Deaf Adults·부모가 청각장애인인 자녀)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청각장애·언어장애가 있었다. 수화를 배우지 못해 '가족끼리만 통하는 손짓'으로 소통했다. 손짓도 모자라 몸짓, 눈빛을 모두 다 써야했다. 배움이 부족했던 부모는 다섯 남매를 학교에 보내야하는지도 몰랐다. 다섯 남매의 맏언니인 김공순이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새벽 5시만 되면 부모님은 들에 농사 일하러 나가버려요. 그러면 오로지 내가 온갖 집안일을 하는 거에요. 가끔 부모님은 남의 집 가서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돈 쪼끔 받아오고." 김공순은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 대신 빨래하고, 동생들 기저귀를 갈아주고, 죽을 끓였다. 식탁에 올라온 김치는 옆집에서 빌려온 반찬이었다. 허여멀건 죽에 남의 집 김치를 후루룩 말아 먹는 게 일상이었다. 한번도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학용품 살 돈이 없어서 선생님께 혼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친구들은 약점이 많은 김공순을 놀렸다. 지독하게 가난한데, 부모가 말을 못해서 마음이 더 가난해졌다고 했다.
"엄마~ 하면서 집에 들어가야 되는데 엄마가 없잖아요. 우리는 항상 엄마가 없었어요.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엄마가 아닌 엄마가 돼야 했어요." 하필 집은 학교 바로 옆이었다. 말을 못하는 부모님이 서로 "엉엉! 앙앙!" 소리내며 싸우면, 그 소리가 교실까지 들렸다. 친구들은 "느그(너네) 집 또 싸우네~"하며 공순이를 놀렸다. 그럴 때면 담벼락 밑에서 친구들 몰래 눈물을 훔쳤다.
"부모님 얘기하면..지금도 눈물이 나요. 정말 힘들었어. 대화가 없으니까. 말을 모다니까(못하니까) 그게 제일로 힘들어."
김공순 부모는 동네 왕따였다고 했다. 나중에야 부모님이 동네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두들겨 맞으면 동네 사람들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폭행은 여름만 되면 반복됐다.
"사람들이 무시한다. 어? 저 버버리(언어장애인)가네. 막 그랬거든. 손가락질하고. 아무래도 장애인 자식들은 좀 틀리지(다르지), 주위에서 대화하는 게. 우리만 이렇게 살았던 것 같애. 왕따지, 왕따." 김공순, 공순이가 되다
영화 '공순이' 스틸컷고등학교 땐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낮에는 신발 공장,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녔다.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5시 반까지 공장에서 일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면 공장 앞에 학교가는 버스 10대가 쭉 늘어져 있었다. 여느 공순이들처럼 각자 학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저녁 6시부터 시작한 수업시간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숙제를 안 해도 혼나지 않았다. '숙제 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선생님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공순은 신발공장 에이스였다. 나이키, 프로스펙스, 월드컵 등 못 만드는 신발이 없었다. 1980년대 부산 경공업 호황을 이끈 그야말로 '공순이'였다. 아득바득 일하면 더 고난도 일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만큼 월급이 늘었다. 짜장면이 500원하던 시절, 월급이 2만원에서부터 14만 5천원까지 쭉쭉 높아졌다.
돈을 더 벌기 위해 특근까지 했다. 밤 11시에 수업을 마치고도 공장에 돌아가 새벽 5시 반까지 다시 미싱질을 했다. 밤을 꼬박 새는 특근수당까지 더해 받은 월급 17만원을, 김공순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돈이 보이니까 한~개도 안 힘들었어.(웃음)" 1천원을 벌면, 300원만 쓰고 700원을 주머니에 꼭꼭 챙겼다. 남들이 초콜릿을 먹을 때, 꾹 참고 한푼 두푼 아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동생들에게 모두 베풀었다.
"터미널에서부터 허리, 머리에 막 (선물을) 이고 가는 거야. TV도 사 갔어. 14인치. 동생들 주려고 양말, 옷, 학용품을 보따리에 이렇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웃음)" 다시, 억척스러운 공순이로
영화 '공순이' 스틸컷김공순은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아이를 낳고 화목한 가정에서 살고 싶었다. 순수하고 착한 딸 유소영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돈이 발목을 잡았다. 김공순 남편은 '사업을 하겠다'며 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대출을 받아달라는 말에 냉큼 집을 담보로 내놨다. 최대한도까지 대출을 받았다. 열심히 일해보겠다는 남편을 최대한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돈을 나도 모르게 다 쓴 거에요. 엉뚱한 데다. 자기 말로는 뭐 사업하는 데 썼다고 하는데 그거 따져본들 뭐해? 이미 썼는데. 그래서 (스스로) 다시 시작하자. 열심히 하자, 그래했지. 진짜 죽으라는 법은 없어." 남편은 미안함에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또다시 김공순이 직접 나서야 했다. 누구를 원망할 시간조차 없었다. 절실하게 일을 구했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기술을 배웠다. 절대 꾀 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일했다. 돈을 제일 많이 주는 곳에서, 온몸을 다해 일했다.
"에너지가 넘쳐요. 타고났나봐요, 일꾼으로. 일이 재밌어요. 일 들어올 때가 제일 재밌어요. 막노동할 팔자가 있나봐요(웃음). 처음 가면 막 엉망이잖아요, 집이. 근데 다 해놓고 나서 딱 보면 깨끗하잖아요. 깨끗해지면 얼마나 뿌듯한데. 진짜 그 같이 좋은 게 없어."
영화 '공순이' 스틸컷이제 김공순은 못하는 일이 없다. 도배, 장판, 천장, 철거, 미장, 방수, 창틀(샤시), 타일, 설비, 난간, 보도블록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하는 게 더 빨랐다.
5년 전, 김공순은 갑상선암에도 걸렸다. 툭 튀어나온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암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다. 언제나 일이 먼저였다.
소영씨는 옆에서 엄마 김공순을 오랫동안 지켜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엄마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려서 이제 말라버렸어. 그래서 힘들어도 막 웃는 거야. 근데 엄마 세대는 다 그런 것 같아." 엄마, 김공순이 이겼다
영화 '공순이' 스틸컷"돈을 많이 벌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김공순은 어린시절 부모님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돈을 한 무더기 안겨드리고 싶었는데, 돌아가신 거. 그게 마음속에…(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게 가슴이 제일 아파요. 부모님께 '공순아 잘 살았다. 고생했다. 사랑한다' 이런 목소리를 듣고 싶네요." 김공순은 건강이 따라주는 한 계속 일할 작정이다. 몸으로 일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김공순은 아직 현역이다. 인터뷰를 하는 날에도 방 9개 도배를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비결은 긍정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든 일도 많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슬픔에 잠기면 한없이 슬프기에 늘 기쁨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웃고 즐기다보니 늘 웃음이 가득하네요. 지금은 힘들지라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더라고요."
영화 '공순이' 스틸컷소영씨는 엄마 김공순을 따라다니면서 캠코더로 영상을 찍었다. 엄마 김공순의 삶을 차곡차곡 모아 다큐멘터리 영화 '공순이'를 만들었다. 소영 씨는 영화의 끝에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운명 CODA.숨겨야만 했던 이름, 공순이.
우리를 살리기 위한 선택, 이혼. 그리고 노가다.
세상 모든 고난의 화살은 엄마에게 향했지만
엄마는 당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스스로 뽑아내고
그 끝에 사랑표를 달아, 다시 세상에 쏘아 올렸다.
엄마가…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