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 '세월호 참사 10주기' 참사와 함께 한 사람들…소방관·경찰관·시민들 ②'세월호 참사 10주기' 참사와 함께 한 사람들…의사·해양경찰관·공직자들 (끝) |
광주CBS가 마련한 세월호 10주기 기획. 16일 두 번째 순서로 세월호 참사 현장에 있었던 의사와 해양경찰관과 전남도청·전남교육청 소속 공직자의 기억을 보도한다.
의사 제갈재기 "여러 상황에 대비했지만 더 이상 환자가 오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10년 전 이날 의사 제갈재기씨는 전남 목포 한 병원 외상센터에서 근무 중이었다. 전날 당직 근무를 섰던 제갈씨는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을 나섰지만 잠시 뒤 다수의 인명 피해가 우려돼 재난의료지원팀(DMAT, Disaster Medical Assistance Team)을 꾸려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갈씨는 곧바로 재난의료지원팀에 소속돼 진도 팽목항으로 이동했다. 의료진은 간호사와 응급구조사, 의사 등으로 꾸려졌고 의사만 4명 정도가 팽목항을 찾았다.
팽목항 대합실에 꾸려진 임시 진료소에서 순번을 정해 당직 근무를 섰지만 임시 진료소를 찾은 세월호 탑승 승객은 없었다. 저체온증이나 익수 등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사고 당시 구조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팽목항으로 살아 돌아온 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재기씨는 "구조된 환자들이 몇 명이 더 온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니 더 이상 오지 않았다"며 "팽목항이 아닌 목포 쪽으로 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봤지만 거기에도 환자들은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많은 환자들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니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직감적으로 구조할 수 있는 상황이 지나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준석 선장이 타고 왔던 배가 제가 본 마지막 구조자들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 등이 팽목항을 찾았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제갈씨는 당시 환자들이 팽목항으로 돌아왔더라도 제대로 된 진료나 치료가 가능했을지 의문을 품기도 했다. 상당수 병원으로 의료진을 보냈지만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없는 상황에서 치료 가능 인원이나 상황 등에 대한 파악이 원활히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갈씨는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며 "간간히 우리에게 와서 몇 명 구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다였다"라고 덧붙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이어진 이태원 참사 등과 관련해서 제갈씨는 "이태원 참사도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이 닮아 있다"며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참사 등으로 숨진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특히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무력감이 가장 힘들게 했다"라고 말했다.
목포해경 나숭권 계장 "오로지 구조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수색에 나섰던 나숭완씨. 박성은 기자당시 목포해양경찰 소속이던 나숭권씨는 부산에서 수리된 경비 함정을 타고 수색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세월호 참사 현장에 투입됐다. 이전에 나씨가 봐온 구조 상황들은 대부분 어선이 전복되거나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 일부 침수된 상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씨는 수백 명이 타는 여객선이 전복돼 있는 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씨는 "현장에 투입됐을 당시에 배가 사실상 거의 침몰해 배의 앞부분만 조금 남아있는 상황이었다"며 "해경 근무 기간이 그렇게 짧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커다란 여객선이 이렇게 전복될 수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처음 봤다"라고 말했다.
당시 해경은 사고 해역 인근을 구역별로 나눠 경비함정별로 수색을 진행했다. 각 경비함정별로 할당된 구역 내에서 해경은 직접 해상에 투입돼 쌍안경과 조명탄을 이용해 수색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들의 캐리어 등 소지품이 종종 발견되기도 했다.
당시 현장 상황에서 들었던 생각을 묻는 질문에 나씨는 단호하게 "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고 정신없이 '사람을 찾자. 실종자를 찾아 구조하자'는 생각뿐이었다"며 "정말로 당시 현장 직원들 간 별다른 대화도 없이 사람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었고 단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자는 마음 밖에 없었다"라고 답했다.
이어 "20여 일을 수색 현장에 있으면서 시신이 올라오는 모습을 가장 많이 봤다"며 "지금도 출퇴근 하면서 노란 리본을 보면 그 장면이 기억이 날 정도로 처음 겪는 일이었고 충격이 심했다"라고 말했다.
나씨를 포함한 당시 현장에 있던 해양경찰관은 트라우마에 시달려 산림 치유 프로그램 등을 찾는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해경들이 쏟아낸 노고와는 별개로 참사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로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는 뼈아픈 기억도 덧붙였다.
아픈 참사를 발판으로 해경 조직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씨는 "그전에는 비상상황에서 출동하는 거점 파출소 개념이 었었는데 현재는 최일선에서 잠수할 수 있는 인력들이 있는 거점 파출소가 20여 곳이 꾸려졌다"며 "장비도 더 최신화되고 대형화됐고, 현장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들이 대거 늘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라고 설명했다.
전라남도 강영구 자치행정국장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가슴 아팠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진도 팽목항 등에서 지원 활동을 한 강영구씨. 전라남도 제공10년 전 살아서 돌아온 학생들과 돌아오지 않는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부모들의 곡소리로 아비규환이 됐던 진도체육관. 당시 전라남도 강영구 보건과장에게 주어진 업무는 돌아온 학생들의 명단을 관리하고 상태에 따라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일이었다.
전라남도 강영구 자치행정국장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진도체육관에서 구출된 학생들이 계속 체육관에 도착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배 안에 갇혀있는 학생들의 부모들을 지켜보는 일이었다"면서 "그 부모들의 피를 토하는 심정을 지켜보며 3일 내내 잠도 자지 못하고 날을 샐 수밖에 없었다"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강 국장은 당시 구출된 학생들이 진도 팽목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체육관으로 오면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체육관에 온 학생들 중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병원으로 보내고, 그 외에 학생들은 남아 대기하도록 했다.
돌아오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일을 하면서도 당시 직원들은 또 다른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
강 국장은 "당시 내가 구해줄 수 있다면 구해주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지만 사실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지금처럼 안전 부서 등 조직이 체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장에 있는 공무원들은 무력했고 마음이 아팠다"라고 말했다.
이어 공직자로서 느꼈던 무력함과 답답함을 기점으로 참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조했다. 강 국장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엊그제 일 같이 느껴지는데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고 잊히지 않겠냐"면서 "젊은 친구들의 큰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트라우마 등 심리 지원 치료 지원은 계속 이어져야 하고 안전 분야에 있어서 더 반성하고 개선해나가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전남도교육청 정성희 장학관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이 트라우마로"
박성은 기자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교육청 장학사였던 정성희씨는 진도체육관에서 구조된 아이들을 만났다. 세월호에서 구조돼 육지로 올라온 학생들을 만나 옷을 입히고 명단을 작성했다. 사고가 나자마자 달려갔던 진도체육관에서 정씨는 6개월 넘는 시간을 생활했다.
정씨는 당시 세월호와 관련된 이야기만 들어도 눈물이 났다. 정씨는 "사망자를 인양하는 과정에서 두 학생이 껴안은 모습을 봤다"라며 "아이들이 의지할 곳 없이 무서움을 견뎠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참사가 끝난 이후에도 진도와 팽목항을 방문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막을 수 있는 인재를 미리 막지 못한 미안함이 컸다"라며 "학생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에게 미안함이 뒤섞여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면서 극복했다"라고 설명했다.
정씨는 아직도 안전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정씨는 "또다시 참사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려면 안전 교육에 대한 촘촘한 플랫폼이 더 필요하다"라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현장 위주의 안전 교육 재정비는 참사와 관계없이 자주 이뤄져야 한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