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수 - 이충무공의 효심이 살아숨쉬는 곳
2.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3.칠천량- 패배의 쓰라린 기억, 역사의 교훈삼아
4-1.진도- 왜덕산, 적장후손들이 찾는 평화의 무덤
4-2. 진도- 명량해전에서 쇠사슬 사용은 사실인가?
5.남해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울돌목에서 쇠사슬 설치는 사실인가 설화인가? 바다 물결이 소용돌이 치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울돌목. 거센 물살 때문에 배들이 밀물과 썰물 때에 맞춰 이동해야 통과가 가능할 정도이다. 전남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좁은 해협 울돌목은 명량대첩으로 유명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일본전선 133척에 맞서싸워, 31척을 깨뜨리고 적을 물리친 곳이다.10배가 넘는 적선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일반적으로 쇠사슬(철쇄, 鐵鎖)의 사용을 많이 떠올린다.양쪽에 쇠사슬을 걸어서 적선이 밀려올 때 이를 들어올려 곤두박칠치게 하여 침몰시켰다는 것이다.지금의 중장년층은 학창시절 책을 통해 그렇게 접해왔고,
철쇄 사용는 명량해전 참여했다 전사한 수군의 묘비에서도 발견된다. 전남 진도군 ''정유재란 순절묘역''에 1948년에 세워진 조응량의 비문에는 그가 명량해전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철쇄(鐵鎖)작전으로 대승하는 공을 세웠으나 적을 소탕중 배가 전복되어 전사했다고 기록되었다. 400년 세월이 흘러 새긴 묘비이지만,이 비문은 철쇄 사용이 민간대중들 사이에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울돌목에서 쇠사슬 설치에 대해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과 학계의 연구가 나와 대중적 통념을 뒤집고 있다. 1997년 이종학 (당시 독도박물관장)씨는 쇠사슬 설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지난 1904년 일본해군의 소이번 오가사와라 중좌가 쓴 ''일본제국 해군권력사 강의''라는 책에는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쇠사슬을 늘어뜨려 일본배를 침몰시켰다고 전하는 등 일본학자들 상당수가 쇠사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난중일기나 명량대첩 장계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서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연합뉴스와 인터뷰 기사)
쇠사슬 설치 주장은 10배가 넘는 적선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명량대첩을 이룰 수 있는 객관적인 승리 요인은 어떤 것일까? 평균 수로 폭이 250미터에 불과한 협수로의 지형적 여건과 조류의 흐름을 최대한 활용했다. 임원빈(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씨는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에서 이순신의 작전구상을 이렇게 정리했다."먼저 조선수군함선들로 하여금 협수로 바깥쪽에서 입구를 차단하여 횡렬로 벌려 서서 13척 모두가 화력을 운용할 수 있도록 포진시킨다. 또 왜함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이용하여 선두의 5-10여척만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한다."" 왜 수군은300여 척의 함선 가운데, 협수로에서 기동이 원활하지 않은 대선인 아다케를 제외시키고, 판옥선보다 작은 세키부네 130여 척을 명량해전에 투입하였다. 명량해전은 한산해전때와는 정반대의 전술을 펼쳤다.한산해전은 수로가 좁은 견내량에서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적을 격파했다면, 명량해전은 적을 협수로로 끌어들여 그 입구를 막아서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조선수군의 전투역량이 한산때는 우세했고,명량때는 절대적 열세인 점을 감안한 것이다. 임교수는 명량해전 승리요인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했다.첫째, 명량의 지형적 조건을 이용해 절대열세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순신의 전략전술이요,둘째,각종 총통으로 무장한 강력한 판옥선의 전투력이요,셋째는 모든 조선 수군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수 있는 이순신의 지휘통솔 역량을 꼽았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적고 있듯이,명량해전은 기적같은 승리였기에 쇠사슬 이야기가 그 의문을 푸는 열쇠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량해전의 흔적을 찾아서- 벽파진전첩비,독굴산과 백토마을, 그리고 진도향교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세력은 전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우리 함대가 벽파진에 머물고 있던 9월 14일, 임준영이 일본 함대 200여 척 중에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한 사실을 알려왔다. 또,일본군에 붙잡혔다가 도망쳐온 김중걸은 "일본 수군이 우리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중"이라느 소식을 전해왔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순신은 9월 15일 진영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적은 수의 전선으로 명량 협수로를 등지고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라는 훈시를 통해 장병들의 각오를 다지게 한다.9월 16일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군선이 명량해협을 통과해 우리 진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은 시작되었다.
진도대교 아래를 흐르는 울돌목에 이르자 과연 물의 소용돌이가 보였고, 그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솨솨 귓전에 울렸다. 그곳에는 4천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조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2007년 4월 이 발전소에 설치할 7백톤짜리 발전용 터빈을 싣고가던 바지선이 평소 유속의 두배인 시속 14km의 밀물 조류에 휩쓸려 진도대교에 부딪히는 사건도 있었다.
진도대교 아래에는 이순신 장군이 손을 들어 지휘를 하는 모습의 커다란 동상이 서 있다. 높이 30미터로,좌대 15미터, 동상 15미터 규모이다. 또, 해상상설무대가 설치되어 매월 2,4째주 일요일 오후 4시에 남도소리여행 공연이 펼쳐진다. 상설무대 나무벽면에는 이순신의 생애를 담은 그림과 글귀가 10편으로 구성되어 배치되어 있다.
진도읍 읍성 뒤편에 진도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도향교에 왜병이 쳐들어왔을때 유림 김희남이 피난하면서 명륜당 기둥에 "천하에 어찌 공자의 도가 없겠는가 (天下豈無夫子道)"라는 글귀를 남기고 떠나자 그 뒤 왜병들이 향교에 침입하여 불태우려다 이 글귀를 보고 경탄하여 그 글귀 옆에 "이 곳에도 충렬의 선비가 있구나(此地亦有忠烈士)"라는 글로 화답하고 후퇴했다는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대성전 옆 뜰에는 330년 된 동백나무 고목이 그 유서깊은 역사를 드러냈으며, 연초록 풀밭 위에 붉은 동백꽃 한송이만 모가지째 떨어져 빛나고 있었다. 그 선연한 동백꽃의 자태는 진도 정유재란 순절묘역에 잠들어 있는 진도 민초들의 영혼인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