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다른 공연이 펼쳐지잖아요. 관객들 기운 덕이죠. 그 기운을 받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펼치다 보면 관객과 서로 일치되는 순간을 느껴요. 그렇게 천장마저 들썩일 듯한 에너지가 극장 안에 가득찰 때가 있죠. 그 찬란한 소멸이 또다시 새로운 무대를 낳는 힘이 됩니다."
최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길해연은 우리 시대에 여전히 연극이 필요한 이유로 배우와 관객이 함께 느끼는, 이러한 일체감을 들었다. 물론 그 일체감의 형태와 크기는 매 공연마다 다르다는 데서 연극만이 지닌 특별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연극을 '찬란한 소멸'로 칭한 까닭이다.
관객과 함께하는 '찬란한 소멸'의 순간을 빚어내기 위해 연극인들은 부나비처럼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리고 살아야 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니 받아들이라는 훈계는 이제 옛말이다.
길해연이 3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해 올해로 4년째 재단법인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연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우라는 이름을 얻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연기를 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죠. 제가 어려울 때 손을 잡아준 이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연극계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책임감이 크니까요."
"연극인 향한 지지와 응원…서로 연결됐단 사실에 해법"
보다 많은 연극인들을 지원하려 애쓰다 보니 살림살이는 여전히 빠듯하다. 그럼에도 연극인들의 자긍심과 삶의 질을 높인다는 설립 취지를 넉넉하게 품으려는 수많은 의지가 모여 20년 명맥을 이어온 셈이다.
길해연 이사장은 연극인복지재단의 궁극적인 역할로 "연극인들을 향한 정신적인 지지와 응원"을 꼽았다.
"물론 장학금제도, 배우·스태프 시상, 긴급지원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죠. 이러한 지원사업의 목적은 결국 연극인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있다는 걸 저 역시 잘 압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기억하고 알아주는 데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결국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연극인복지재단의 모든 주요사업은 사실상 기부를 통해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부자들 역할은 그래서 절대적이다.
"재단 이사들 모두 무보수로 일하고 있어요. '연극인으로서 당연하다'는 생각들이 모였으니까요.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 같은 분들 도움이 컸죠. 박 대표 노력 덕에 지난해 후원회도 결성돼 보다 안정적인 자금 확보가 가능해졌거든요. 후원의 밤 행사로 배우 김호영 그림을 경매에 붙이는 등 업계 스타들 재능기부도 이어져 큰 힘을 얻고 있죠."
"기억해줘 감사하단 말들에 왈칵…연극 위상 되찾기 물꼬"
"장학금을 받는 자녀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엄마 아빠가 너희에게 주는 선물이야'라고요. 돌아가신 연극인 자녀들 장학금은 신청이 아니라 저희가 먼저 연락을 취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줘 감사하다'는 말들에 왈칵할 수밖에 없죠. 누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더라도, 먼저 찾아가는 복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순간들이에요."
그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존'과 '자긍'"이라며 "연극인으로서 인정받으려는 몸짓들을 놓치지 않는 데 연극인복지재단의 눈과 귀가 집중돼 있다"고 전했다.
"흔히들 '예술이 밥 먹여주냐'는 말을 하잖아요. 그럼에도 예술은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인류에게 예술은 왜 필요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른바 연극 등 기초 예술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반드시 병행돼야 합니다. 사람 사는 곳에 안전장치가 빠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잖아요."
길 이사장은 "연극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연할 기회"라며 "무엇보다 연극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공연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도록 애쓰겠다"고 강조했다.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연 연습을 하러 오는 후배들을 봅니다. 최소한 공연하는 동안만이라도 아르바이트를 쉴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에요. 공연 준비하는 연극인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밥집을 운영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웃음) 이만큼 많은 일을 하고 싶은데, 지금은 요만큼 밖에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물꼬라고 믿습니다. 연극이 위상을 되찾고, 연극인들도 존중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여는 물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