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계가 오랜만의 호실적에도 웃지 못하는 형편이다. 한동안의 침체를 딛고 실적이 개선되기 무섭게 정치권을 중심으로 횡재세 논의가 재차 흘러나와서다. 불황 때는 외면하다가 잠깐의 호실적 때면 번번이 횡재세를 언급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업계 전반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4일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업계의 올해 1분기 석유제품 수출량은 총 1억2690만 배럴로 나타났다. 종전 1분기 최고 기록인 2020년 당시 1억2518만 배럴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수출 금액은 124억16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6% 증가했다.
정유사별로 봐도 실적 개선이 눈에 띈다. SK이노베이션은 1분기 석유사업 부문에서 영업이익 5911억원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했다. 에쓰오일은 1분기 4541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전년 동기보다 11.9% 감소했지만, 564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직전 분기와 비교하면 흑자로 돌아섰다.
HD현대오일뱅크은 1분기 3052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전년 동기 대비 17.8% 증가한 수치다. GS칼텍스도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 상승이 예상된다. 지난해 말 '적자 쇼크'를 맞은 정유사들이 영업손실을 털고 일제히 상승세로 접어든 것이다. 지난해 4분기에는 정유업계의 합산 영업적자만 1조원이 넘었다.
정유업계의 호실적은 중동 정세 악화로 국제유가가 상승한 게 주요하게 작용했다. 정유사의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은 1분기 평균 12.5달러로, 통상 손익분기점인 5달러의 2.5배 이상 높았다. 유가 상승에 따라 정유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재고가치가 높아진 점도 1분기 수익성 개선에 영향을 미쳤다.
숨통이 트일만하자 정치권에서는 역시나 횡재세 논의가 고개를 들었다. 횡재세는 일정 기준을 초과해 과도한 이익을 낼 경우 법인세 이외에 추가로 부과하는 세금을 말한다. 고유가·고금리 등으로 호실적을 낸 기업으로부터 부담금을 걷어 사회적 고통을 함께 분담하자는 논리다. 실제 일부 해외 국가에서는 횡재세를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횡재세 논의를 띄운 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였다. 그는 지난달 22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고유가 시대에 국민 부담을 낮출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민주당은 지난해 유동적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횡재세 도입을 추진한 바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국민께서는 유가가 오를 때는 과도하게 오르지만 내릴 때는 찔끔 내린다는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막연하게 희망 주문만 낼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조치로 국민 부담을 덜어야 한다"며 횡재세 도입을 제안했다.
일각에서는 해외 사례를 들며 횡재세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국내 정유업계는 타당하지 않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글로벌 정유업체와 국내 기업들의 수익 구조 자체가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업체들은 주로 땅속이나 바다 밑에서 채굴한 원유를 팔아 돈을 벌지만, 국내 기업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원유를 정제한 뒤 제품으로 판매하는 정제마진으로 수익을 보는 구조다. 그마저도 70% 이상이 수출되고, 국내에 유통하는 양은 얼마 안 된다. 더구나 글로벌 업체들은 원유 생산량 조절로 국제유가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국내 기업들은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국제 가격 형성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4분기처럼 대규모 손실이 났을 때는 아무런 지원이 없다가 실적이 개선될 때만 세금을 부과하는 건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적잖다. 횡재세를 매긴다면서 대상을 정유사로 한정하는 걸 두고 형평에 맞지 않다는 비판 역시 만만찮다. 여기에 이미 법인세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세금을 부과하면 이중과세의 위헌 소지까지 다분하다.
업계에서는 당장 2분기부터 실적이 재차 악화할 수 있다며 부상하는 횡재세 논의에 위축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현재 지정학적 위기가 끊이지 않는 상황이라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 올해 실적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며 "어려울 때는 외면하다가 이익이 날 때만 과세를 한다면 어떤 기업이 투자를 하고 혁신을 하고 노력을 하겠나"고 반문했다.
이어 "횡재세는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될뿐만 아니라 투자 위축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에 전반적인 산업 발전 자체를 저해할 수 있다"며 "기름값, 고유가라는 이름이 갖는 부정적인 인식을 이용해 징벌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