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공백에 또 '불법' 내몰린 간호사…"PA만의 문제 아냐"

'빅5' 등 전공의 대거 사직한 20일 저녁 이후 간호사 애로사항 154건 접수
PA보다 일반 간호사(72%)가 3배 높아…수술봉합外 진료조정 등까지 '격무'
밤근무 서고도 오프 없이 '개인연차 쓰라' 강요…"법적 보호장치 만들어달라"

23일 서울 장충동 대한간호협회 서울연수원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탁영란 대한간호사협회장이(왼쪽) 의사 집단행동으로 불법 의료행위에 노출된 간호사의 보호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대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무더기로 사직하면서 발생한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간호사들이 불법 진료행위로 내몰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간 현장의 의사인력 부족으로 음지에서 전공의의 일부 업무를 대신해온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뿐 아니라 상당수의 일반 간호사들이 강제로 대리처방·수술 보조 등을 대신하며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언이다.
 
대한간호협회(간협)는 23일 서울 중구 소재 간협 서울연수원 강당에서 '의료파업에 따른 현장 간호사 업무가중 관련 1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간협에 따르면, 협회가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등의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한 지난 20일 오후 6시 개설한 '의료공백 위기대응 현장간호사 애로사항 신고센터'에는 이날 오전 9시까지 총 154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가 들어온 의료기관을 종별로 분류하면, 전공의 비중이 높은 상급종합병원이 62%로 가장 많았다. 이어 종합병원(36%), 병원(전문병원 포함, 2%) 순으로 조사됐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전날 오후 10시 기준 주요 수련병원 94곳에서 사직한 소속 전공의는 전체 약 78.5%인 8897명으로 집계됐다. 사직서를 내고 실제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는 7863명으로 70%에 육박한다.
 
필수의료의 핵심인력인 전공의들의 공백이 나흘째 지속되면서, 정부는 이날 오전 8시를 기해 보건의료 재난 위기경보 단계를 '경계'에서 최고 수준인 '심각'으로 격상했다. 코로나19 대유행과 같은 감염병이 아닌 보건의료 재난으로 '심각'이 발령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뒤 간호사가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불법진료 행위 지시'로 파악됐다.
 
구체적으로 △채혈 △동맥혈 채취 △혈액 배양검사 △검체 채취 및 심전도 검사 △잔뇨 초음파(RU Sono) 등 치료·처치 및 검사 △수술보조·봉합 등 수술 관련 업무 △비위관(엘튜브·L-tube) 삽입 등 튜브 관리 △병동 내 교수 아이디를 이용한 대리처방 등이다.
 
이밖에 초진기록과 퇴원요약·경과기록지, 진단서 등 각종 의무기록을 대리 작성하거나 환자 입·퇴원 서류 작성 등도 간호사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고 주체는 일반 간호사가 72%로, PA 간호사(24%)의 3배에 달했다.
 
다만, PA 간호사의 경우 '16시간 2교대 근무'에서 '24시간 3교대'로 근무형태가 바뀐 이후 평일에 밤번 근무(오후 9시 반~익일 아침 8시)를 하고도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오프'(휴일·Night Off)를 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개인 연차를 써서 쉬도록 압박했다는 것이다.
 
또 당직 교수가 '처방 넣는 법을 모른다'며, 휴무인 간호사를 강제로 출근시킨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불법진료뿐 아니라, 전공의 집단행동에 따른 외래진료 조정, 수술 취소 관련 안내나 스케쥴 조정을 위한 전화, 드레싱 준비, 세팅 및 보조, 환자와 보호자들의 불만 응대, 교수 당직실 준비 등도 고스란히 간호사들의 몫이 됐다.
 
이처럼 간호사들이 격무로 인한 '번아웃'에 시달리면서, 환자 안전도 위험에 처했다. 보통 나흘마다 하던 환자 소독 시행주기가 1주일로 늘었고, 이틀 주기로 이뤄지던 거즈 소독도 평일에만 실시한 사례도 확인됐다.
 
간협은 대다수의 간호사들이 뾰족한 '법적 보호장치' 없이 불법 의료행위에 내몰린 점을 지적하며 간호법 제정 필요성을 거듭 역설했다. 간호사들의 역량과 수행 업무가 고도화되면서 의사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일종의 '그레이존'이 생겨났고, 법적으로 이 모호한 영역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전문간호사에 대한 업무범위 인정과 더불어 전담간호사의 법적 안전망 확립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도 강조했다.
 
간협 탁영란 회장은 현재 상황이 의대 정원 확대를 이유로 의료계가 대대적 집단행동에 나선 지난 2020년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탁 회장은 "코로나로 국가보건의료재난 상황이었던 2020년 8월 전공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환자의 생명을 저버린 채 의료현장을 떠난 바 있다"며 "당시에도 지금처럼 간호사들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 법적 보호장치 없이 투입됐고, 일부 간호사들은 전공의들로부터 고발까지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간호사들은 지금도 전공의들이 떠난 빈자리에 내몰리면서 하루하루 불안 속에서 과중한 업무를 감당해 내고 있다"며 "이는 정부가 (대책의 하나로 꼽은) PA 간호사들만이 아니라 의료현장의 모든 간호사가 겪고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탁 회장은 "국민의 생명과 환자안전을 위해 끝까지 의료현장을 지키겠다는 간호사들을 더 이상 불법진료로 내모는 일은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간호사들이 법에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환자 간호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중대본 제1총괄조정관)이 23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다. 복지부 제공

앞서 정부는 전공의들이 집단행동에 나설 경우 이날 발표한 비대면진료 전면 허용과 함께 PA 간호사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임상전담 간호사'로도 불리는 PA 간호사는 전국적으로 약 1만 명 이상이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간협은 이에 대해 "정부와 사전 협의한 바 없었다"며 "특히 현재 전국의 모든 간호사들은 작년 5월부터 진행된 '간호사 준법투쟁'을 통해 간호사 업무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립됐고, 법적 보호 하에 안전하게 일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강화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에 정부도 보건의료 비상상황을 이유로 간호사들의 '불법 진료행위'를 조장할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이날 중대본 브리핑에서 "비상시기라 하더라도 법의 테두리 내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며 "기관장 책임 하에 분명하게 법을 지켜 가면서 (의료 행위를) 진행해 주실 것을 말씀드리고, 또 그렇게 지도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간호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행정명령을 당국과 논의 중이라는 간협 측 발언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발령하시는 것으로, 지금 검토하고 있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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