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겡끼 데스까?"(お元気ですか, 잘 지내고 있나요?)
설원에서 "오겡끼 데스까?"를 외치는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의 모습은 '러브레터'를 본 사람들 뇌리에 여전히 깊이 남아있다. 특유의 감성적인 연출과 미장센으로 국내 관객들 마음까지 사로잡은 이와이 슌지 감독은 올해 '키리에의 노래'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키리에의 노래'는 예매 오픈과 동시에 3분 만에 1천석에 가까운 전체 상영 스케줄을 매진시키며 지금도 '이와이 월드'가 유효함을 증명했다.
'키리에의 노래'는 노래로만 이야기하는 길거리 뮤지션 키리에(아이나 디 엔드), 자신을 지워버린 친구 잇코(히로세 스즈), 사라진 연인을 찾는 남자 나츠히코(마츠무라 호쿠토) 세 사람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감독만의 미장센과 감성으로 그려냈다. 특히 감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상실과 아픔을 밴드 비쉬(BiSH)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아이나 디 엔드의 목소리로 위로한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이와이 월드'를 완성했는지 그리고 어떤 감성으로 한국 관객들을 위로하려 했을까. 11월 어느 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한국을 찾은 이와이 슌지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11년 일본의 상처를 아이나 디 엔드의 노래로 기리다
올해 국내 관객들 마음에 따뜻한 울림을 전한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을 비롯해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내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날을 애도하는 콘텐츠가 나오고 있다. '키리에의 노래' 역시 이와이 슌지 감독만의 영화적인 애도다.
그는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아픔에 관해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가 큰 상처를 입었다고 느꼈다. 그 뒤로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다. 재해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노래 '꽃은 핀다'(花は咲く)를 만들기도 했다"며 "지난 10년 동안 피해 지역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실제 재해가 일어났던 그날 하루보다 그 뒤 긴 시간 동안 일본에 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느끼며 오늘까지 왔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재해가 일어나고 12년 동안 나름대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걸어온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처음 아이나 디 엔드의 노래를 들었을 때,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의 1977년 영화 '하나레 고제 오린'(はなれ瞽女おりん) 속 맹인 샤미센(しゃみせん·목이 길고 줄받이가 없는 3현으로 된 일본의 현악기) 연주가인 오린을 떠올렸다. 그는 "실제로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설 중 굉장히 유명한 맹인 샤미센 연주가가 노래했을 때 각 집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전율이 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오린을 떠올렸을 뿐 아니라 전설 속 가수의 모습과 아이나 디 엔드가 겹쳐졌다. 그래서 캐스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키리에의 노래'는 영화인 동시에 마치 아이나 디 엔드의 공연처럼 느껴질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노래가 관객들 귀와 마음을 울린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 중 하나는 바로 엔딩 크레딧이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나 디 엔드의 목소리와 눈빛으로 관객을 잡아놓는다.
엔딩 노래 '키리에·연민의 찬가'(キリエ・憐れみの讃歌) 중 "지금 이곳을 걷고 있어"라는 가사가 나온다. 여기에 바로 이와이 슌지 감독이 '진짜' 그리고자 한 것이 담겼다. 그는 "어떤 훌륭한 장소를 걷거나 미래를 그리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장소'를 걷고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엔딩의 모습에서 그런 걸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과연 프로가 돼서 성공하는 것만이 이 영화의 엔딩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적으로나 업계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도 좋은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키리에에게 정답일지는 의문이었죠. 그래서 영화에서도 성공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그려지지 않았어요. 키리에가 마지막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현재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해서 그것이 클라이맥스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에 그러한 엔딩 크레딧을 만들었습니다."
이와이 슌지라는 '아티스트'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
이처럼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일반적인 결과 다른 그만의 감수성이 녹아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키리에의 노래'의 시작과 후반부에 나오는 설원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아마도 '러브레터'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러브레터'의 몇몇 장면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관객들을 뭉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한국 관객들의 여전한 '러브레터' 사랑에 관해 "'러브레터'는 나와 한국 팬을 이어준 첫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도 기적 같은 영화인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감독은 "영화나 영상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영상업계는 항상 격변하는 장이다. 비유하자면 카약 같은 아주 작은 배에 몸을 싣고 급류 속에서 열심히 헤쳐 나가는 감각을 갖고 항상 작업하고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천천히 여유를 갖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장소 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고된 것 같기도 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하물며 최근에는 AI(인공지능)가 나오면서 아마도 이 업계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시대로 다시 접어들 것이라고 본다"며 "그런 속에서도 내 나름대로 내가 할 수 있는 표현 혹은 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걸 내 페이스로 작업해 온 걸 사람들이 '이와이 월드'라고 해주는 건 내 작업에 공감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며 "그런데 만약 창작자가 어렵고 높은 허들로 작업한다면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텐데,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이런 것도 만들었다는 걸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 본다면 업계에 발 들이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내가 만드는 작업물이나 방식이 쉽게 젊은이에게 받아들여지길 바란다"는 작은 소망을 전했다.
'러브레터' '릴리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립반윙클의 신부' 등부터 '키리에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자신의 말마따나 그만의 페이스로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를 가능케 했던 원동력으로 '젊은 창작자'를 들었다. 당장 '키리에의 노래' 속 아이나 디 엔드나 히로세 스즈와 같은 젊은 싱어송라이터와 배우는 물론 20대 만화가 등 젊은 창작자들의 재능으로부터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방탄소년단으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젊은 창작자는 제대로 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알고 있고, 각자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자신의 이름을 딴 세계를 구축했음에도 자신만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고집하지 않고, 젊은 창작자들을 통해 '아티스트'로서의 감각을 일깨운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이 슌지 감독이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의 작품을 기억하고, 지금도 그의 새로운 작품을 뇌리에 깊이 새기며 또 다른 '이와이 월드'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젊은 예술가들의 등을 보며 제가 쫓아가고 있어요. 그들의 등을 보며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