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7일 보험료율·소득대체율 등 구체적 모수(母數)를 일체 배제한 연금개혁안을 발표한 가운데 시민사회계에서는 재정안정론에만 치우친 '맹탕'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3대(노동·교육·연금) 개혁' 과제로 꼽으며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밝힌 데 반해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빈 수레'가 요란했다는 지적이다. 약 1년을 끌며 고민해 도출한 정부의 공식 로드맵이라 보기엔 너무도 빈약하다는 취지다.
노동·시민사회단체 300여 개가 모인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연금행동)은 이날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에 대해 한 마디로 "맹탕"이라며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연금행동은 '연령대별 보험료율 차등인상' 등의 방향성만 있는 이번 계획을 두고 "단일안은커녕, 국민연금 소득대체율·보험료율 등 핵심적인 숫자는 아무것도 없고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제시된 정보도 잘못됐고, 도출한 결론도 이상한 과제 짜깁기 수준의 계획을 정부안(案)으로 제시한 윤석열 정부의 수준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며 "민생 핵심과제인 국민연금을 이렇게 우습게 보는 정부는 없었다. 국민연금을 망치고 연금개혁의 책임을 회피하는 윤 정부는 정부의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복지부가 추후 국회를 통한 공론화 주제로 제시한 자동안정화장치 도입 또는 확정기여방식(DC·Defined Contribution)으로의 전환 등도 지탄의 대상이 됐다. 확정기여란 운용수익 등에 따라 급여가 사후에 결정되는 방식으로 보험료와 직접적 연계 없이 정해진 급여를 보장하는 현행 확정급여방식(DB·Defined Benefit)과 반대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급격한 인구구조 변동을 고려할 때 이같은 논의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연금행동은 이에 대해 "(공적연금인) 국민연금 제도 근간을 흔들고 망치는, '국민연금 죽이기 계획'"이라고 맹공했다.
'낸 만큼 받아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공적연금의 사회연대 및 재분배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대 간 형평성을 위한 거라며 보험료를 연령별 차등인상하겠다는 계획 또한 "세대를 나누는 기준이 자의적이고, 재정조달에 있어서의 사회연대 원칙, 부담능력에 따른 부담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연금행동은 "윤석열 정부에게 있어 국민의 존엄한 노후는 정책의 고려대상이 아닌지, 종합운영계획에 구체적 보장목표조차 제시하지 않고 있다"며 "보장목표가 제시되지 않으니 구체적인 숫자가 담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과의 비교를 통해 '소득대체율은 (해외와) 유사한 수준이나 보험료율은 절반 정도'라고 명시한 부분도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편향적으로 개혁논의를 오도하고 있다"고 봤다.
연금행동은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OECD 통계상) 31.2%로 OECD 평균인 51.8%의 60% 수준"이라며 "'기초연금 도입 후 노인빈곤율이 지속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기초연금만의 효과가 아니라 상당부분 66~75세 사이 국민연금 수급률 제고·수급액 개선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금운용 수익률 '1%p' 제고 등을 목적으로 한 운용 개편을 두고는 "수익률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핵심인 자산배분 권한을 각계각층의 대표성을 지닌 기금위에서 기금운용본부로 이관한다고 하는 것은 정권 차원, 정권과 결탁한 자본 차원의 개입을 상시화하겠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농단 사태'가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에서 삼성물산 부당합병비율에 대한 결정이 이뤄"진 데 기인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연금행동은 정부가 끝없이 개혁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실 산하 연금개혁위원회 설치를 번복하고 국회 연금특위로 공을 넘기더니, "구조개혁 운운하며 (특위의) 연금개혁 논의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이다.
연금행동은 "노인빈곤율은 향후에도 높을 전망"이라며 "소득대체율 상향을 포함한 진정성 있는 노후소득보장 방안이 책임 있게 제시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참여연대 역시 논평을 통해 "공적보험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청사진을 내놓기는커녕 기금고갈론 중심으로 논의를 끌어가며 공포를 조장해놓고도 최소한 이를 해소할 만한 어떠한 방안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출생아 감소로 인한 '인구충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정부가 국가 재정책임성을 명확히 하고, 향후 보험료를 가입자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부담하지 않도록 정책적 약속을 분명히 해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국민 신뢰를 제고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했다.
정부안이 '낮은 보장성 수준'과 '넓은 사각지대'를 문제로 짚으면서도 "당당하게 사적연금 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다"며 "사실상 은밀하게 진행되는 연금제도 민영화 시도"라고 평가했다.
참여연대는 "정부와 국회는 대책 없는 시나리오 나열과 지지부진한 논의만 이어갈 것이 아니라 이에 걸맞는 책임 있는 방향과 계획을 내놓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도 공동성명을 내고 "국민연금심의위원회는 가입자단체가 참여하는 사회적 기구로 책임 있는 안이 제시됐어야 하나, 제대로 심의할 시간조차 보장하지 않고 회의 당일에야 계획안을 공개해 노동자 대표의 심의권을 침해했다"며 "엉망, 그 자체"라고 운영계획안을 정의했다.
아울러 "지난 25일 국정감사에서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양대노총이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는 게 맞지 않아 배제한 것이라 발언하는 등 위험천만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복지부 수장으로서 (이번 정부안에 대해) 책임지고 사퇴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양대노총은 내주 각 정당에 '소득대체율 인상' 등의 내용을 담은 연금행동의 대안보고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실질적인 연금개혁'을 위해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기구도 꾸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