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간호법 제정안을 비롯한 쟁점 법안들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민의힘은 퇴장 전략을 쓰며 표결에 맞섰지만 170석을 가지고 있는 거대 야당 앞에 '소수 여당'의 한계를 실감하며 곧바로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을 건의할 방침을 시사했다. 집권여당임에도 불구, 쟁점 법안에 대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거부권에 기대는 모습에 "믿을 건 거부권뿐"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는 27일 본회의를 열고 간호법 제정안과 의료법 개정안, 방송법 개정안 등 쟁점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이날 통과한 간호법 제정안은 간호사의 법적 지위를 의료법에서 분리해 독자적으로 보장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골자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표결에 불참한 가운데, 간호사 출신 최연숙 의원과 시각장애인 김예지 의원은 본회의장에 남아 찬성표를 던졌다. 최 의원은 동료 의원들에게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찬성 토론을 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아울러 이날 본회의에서 야권은 이른바 '쌍특검(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했다. '50억 클럽 특검법'은 대장동 개발사업과 관련해 정치·법조계 인사들이 50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수사하는 것을,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과 관련해 김 여사가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수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날 '쌍특검' 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되면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180일 이내에 해당 법안들을 심사해야 하고,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자동으로 본회의에 부의돼 60일 이내 표결에 부쳐진다. 두 특검법은 늦어도 연말 본회의에서 표결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의회폭주 규탄', '돈봉투 방탄'이라 적힌 팻말을 부착하고 안건 투표 전 집단 퇴장했다가 투표가 끝나면 다시 들어오는 방식으로 항의를 이어갔다. 간호법 제정안 통과 직후 곧바로 규탄대회를 연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학생이 본분을 망각하고 힘자랑하는 게 학폭이면, 국회에서 힘자랑에 여념 없는 것은 국폭"이라며 "민생은 내팽개치고 민주당의 위기 모면만을 위한 입법 폭주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야당이 밀어붙이는 법안들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이미 지난 4일 야당 주도로 통과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원내지도부 관계자는 "민주당이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도해서 대여 공세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하는 것"이라며 "입법폭주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거부권 건의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연속된 거부권 행사는 입법부의 권한을 행정부가 과도하게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대통령에게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거부권은 행정부가 입법부를 견제하는 '최후 수단'으로 제한적으로 활용돼야 하지만, 쟁점 법안마다 거부권 행사가 예상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전날 MBC라디오에서 "자신의 뜻과 다른 모든 법안들을 거부한다고 하면 국회가 도대체 왜 있어야 하나"라며 "아예 민주주의 하지 말자. 그리고 대통령실하고 국민의힘하고 검찰하고 국가를 다 운영하겠다고 선언하시라"라고 비판했다.
거대야당의 본회의 직회부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쟁점법안들의 '공식'처럼 굳어지면서 협치 실종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윤 원내대표는 "협치가 제일 바람직하다"면서도 "야당이 다수의 힘으로 계속 폭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으로서 대응하는 유일한 수단이 재의요구밖에 없다는 것을 국민들이 이해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