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으로 힘든 몸이었지만 경찰의 '촉'은 살아 있었다. 가슴에 투약 기구를 삽입해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것도 '기지'로 극복했다.
충북 청주상당경찰서 소속 정세원(40) 순경의 얘기다.
경찰 3년 차 정 순경은 대장암 4기 환자다. 지난해 초부터 몸에 이상이 생겨 그해 10월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뒤 암 판정을 받았다.
이후 정 순경은 지난달 질병 휴직을 내고 고향인 전북 익산으로 돌아가 항암 치료에 전념했다.
그런 정 순경은 지난달 30일 익산의 한 은행을 찾았다가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수상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ATM 앞에서 오랜 시간 기다리던 이 남성은 자신의 차례가 오자마자 바로 뒤에 있던 정 순경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입금할 게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니 먼저 처리하라"는 배려였지만, 정 순경의 눈에는 그저 호의가 아니었다.
정 순경은 휴직 전 보이스피싱 업무를 담당한 지능범죄수사팀 수사관이었다.
정 순경은 쭈뼛거리는 이 남성을 보고 보이스피싱 수거책 또는 전달책을 직감했다.
그때부터 정 순경은 더 이상 암 환자도, 휴직한 직장인도 아니었다.
경찰임을 밝힌 정 순경은 이 남성에게 돈의 출처 등을 집요하게 추궁했고, 가방 안에서 3개의 봉투에 나눠 담긴 현금 1700만 원을 찾아냈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확신한 정 순경은 곧장 112에 신고했다.
하지만 이 남성이 도망가면 제대로 뒤쫓아갈 몸 상태가 아닌 게 문제였다.
가슴에는 약물 투여 기구인 케모포트를 삽입해 뛰는 것은커녕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정 순경은 선택은 이 남성에게 계속 말을 거는 '심적 제압'이었고,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
정 순경은 "'먼저 하라'는 말 한마디에 보이스피싱 범행이라는 느낌이 왔다"며 "경찰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익산경찰서는 전화금융사기 피해금을 모두 회수해 피해자들에게 돌려준 뒤 보이스피싱 조직으로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