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밥이 생명"…굶주린 노숙인들의 '한끼 원정'

[배고픈 사회, 함께 우는 사람들②]
새벽부터 '첫끼' 위해 몰려든 사람들
하루 지탱과 자활 위한 원동력 '밥'
점심 없는 날은 '수원→천안' 원정도
노숙 텐트촌에 배달된 '꽉 찬' 도시락
"경제난 속 더 힘들까봐 메뉴 늘려"
'저녁 맛집' 소문난 정나눔터로 집결
배를 채워야 추위에도 잠 잘 수 있어
고물가 늪…봉사단체 재료비 부담도
그럼에도 고기반찬 못해 준 '미안함'
"이들에게 밥은 생명…사회 구성원"

경기도 수원역 인근에 노숙인들이 생활하는 텐트촌이 조성돼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 사는 노숙인들은 근처에 있는 무료급식소에 가거나, 교회 및 자원봉사단체에서 보내주는 도시락 등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박창주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새벽엔 국자 들고, 낮에는 공구함…19년째 '따뜻한 이중생활'
②[르포]"밥이 생명"…굶주린 노숙인들의 '한끼 원정'
(계속)

"늦으면 자리 없을까봐 다들 먼저 갔어요. 라면까지 챙기려면 서둘러야죠."
 
지난 15일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6시쯤. 백화점과 대단지 아파트로 둘러싸인 경기 수원역 환승센터 일대에 난데없이 다닥다닥 붙은 텐트 10여 개가 눈에 띄었다. 노숙인들의 '집'이다.
 
바닥에는 먹다 남은 도시락통들이 놓여 있고, 군데군데 비둘기 배설물이 묻어 있었다. 몇몇 텐트는 반쯤 지퍼가 열린 채 텅 비었고, 대체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만큼 떨어진 역사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발 노인이 탄 휠체어에는 이불과 옷, 담배 등 온갖 잡동사니가 묶여 있었다. 30여년 용달차를 몰다 뺑소니에 한쪽 발목을 잃은 노숙인 신모(60대)씨다.
 
취재기자는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며 '배는 안 고프냐'고 물었다. 장갑 낀 손으로 커피를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코에 흐르는 누런 콧물을 훔치며 말문을 열었다.
 
"하나도 안 고파요. 공짜밥 주고, 간식도 줘요. 배고플 일이 있나 뭐… 그런데 지금 몇시죠?"
 

"밥심이 있어야"…가볍지만 간절한 '첫끼'

 
노숙인 신모씨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수원역 역사를 거쳐 무료급식소로 이동하고 있다. 박창주 기자
아침 7시에 가까워지자 신씨는 "이쪽이 지름길"이라며 한 통로로 바퀴를 몰았다. 좁고 굽은 복도를 따라 뒤를 쫓았다. 10여 분 미행 끝에 도착한 곳은 '情(정)나눔터' 간판이 붙은 건물.
 
노숙인들이 끼니를 해결하는 무료급식소다. 66개 좌석은 이미 꽉 들어찼고, 네댓 명은 자리가 없어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깊게 모자를 눌러쓰거나 헝클어진 머리에 허름한 차림을 한 사람들. 모두 굳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 TV 뉴스 외에 아무런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승합차 한 대가 도착했다. '희망의 쉼터'가 적힌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트렁크에서 커다란 플라스틱 통들을 들고 급식소로 들어왔다. 메뉴는 흰 쌀밥과 먹기 좋게 자른 맛김치, 국을 대신한 컵라면이 전부다. 아침답게 단출한 구성이다.
 
"배식은 7시 반부터죠. 저한테 밥을 제일 먼저 줘요. 이거 타고 있으면 자리만 차지하니까."
 
실제 한 봉사자는 "장애인부터 챙겨야 한다"며 식당 밖으로 음식을 들고 나섰다. 바로 옆 공터에 놓인 상자에 '밥상'이 차려지자 기다렸다는 듯 신씨가 다가갔다. 그는 들고 있던 캔커피를 봉사자에게 주며 "늘 고맙다"고 했다. 그러고는 기자에게 "같이 들자"며 환하게 웃었다.
 
노숙인 신모씨는 매일 무료급식소 자원봉사자들이 차려주는 아침밥을 받으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휠체어를 타고 있어 그의 밥상은 늘 야외에 마련된다고 한다. 박창주 기자
급식소 안에서는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손바닥만한 스테인리스 접시에 한가득 밥과 김치를 담아 제자리에 앉았다. 연신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노숙 1년차 새내기 김모(50대)씨다. 평생 어부로 살다 형편이 기울어 가족들과도 헤어지면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공짜 점심 얘기를 듣고 천안역에서 지내다가, 하루 세끼를 준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 전 수원역으로 전입했다. 노숙하면서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여태 살면서 밥이라는 게 눈물 나는 것인 줄 몰랐어요. 아, 헛살았구나 싶었죠. 점심 배식 없는 날엔 김밥이나 햄버거도 갖다 줍니다. 굶지 않는 것 자체가 행복이에요."
 
처음 무료급식 먹을 때는 "전쟁 같았다"고 돌이켰다. 먼저 자리 잡겠다고 이른바 오픈런이 벌어지는가 하면, 노숙인 동료가 아닌 주민들까지 몰려 자리 경쟁이 붙곤 했다는 것.
 
치열함을 뚫고 밥심을 얻어서일까. 김씨는 지역에서 운영되는 노숙인 자활 프로그램에도 열심이다. 비록 지금은 얻어먹는 신세지만 "내년에는 꼭 취업해 떠나겠다"는 각오다.
 
반면 노숙을 접고도 급식소만큼은 떠나지 못하는 이도 있다. 5년 전 수원역을 탈출해 근처 임대주택으로 들어간 최모(70대·여)씨다. 수원과 천안을 오가며 무료급식소를 찾는 데 대해 "정이 들어서"라고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마지못해 털어놨다.
 
"이혼한 뒤로는 자식도 다 소용없더라고요. 다 끊겼죠. 그래도 여기는 밥을 주니까 자꾸 오게 됩니다. 형제들도 밥을 안 주는데… 점심 없는 날에는 천안역 가서도 먹고 그래요."
 

'꽉 찬' 점심 도시락…경제 한파에도 '情 후끈'

 
점심 때가 되자 노숙인 텐트촌 인근에 한 민간단체가 도시락을 들고 나타났다. 노숙인들 60여 명이 줄을 서 음식과 생활용품 등을 받고 있는 모습. 박창주 기자

정나눔터는 화·수요일과 일요일 점심은 배식이 없다. 이런 날은 멀리 떨어진 또 다른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니거나 시민단체 등이 갖다 주는 도시락을 기다려야 한다.
 
이날 노숙인 텐트촌은 점심 밥차가 오는 날. 오전 11시쯤 환승센터 근처 공터에 노숙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옷과 마스크는 거뭇하게 얼룩졌지만, 환하게 퍼진 햇살처럼 얼굴만은 밝아 보였다.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담소를 나누다가도, 차량 지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도로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이곳에서 신참 김씨를 다시 만났다.
 
"평소 11시쯤이면 왔는데 오늘은 어째 늦네요."
 
30여 분 지나 승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차문이 열리자 60여 명의 노숙인들이 길게 두 줄로 오열을 맞췄고, 몇몇은 차량으로 달려가 비닐봉지와 상자 등 짐을 나르며 바삐 움직였다.
 
점심은 도시락이다. 모둠까스와 메추리알 장조림, 양배추 샐러드, 멸치볶음, 김치 등 5첩 반상 부럽지 않다. 믹스커피와 귤 등 디저트는 물론, 전염병과 추위를 견딜 마스크와 롱패딩이 덤으로 준비됐다.
 
노숙인 김모씨가 봉사단체에서 준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다. 박창주 기자

기자가 '물가도 비싼데 준비하기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봉사단체 관계자의 답은 명료하면서도, 갓 지은 밥처럼 따뜻했다. 멋쩍은 질문이 돼버렸다.
 
"다들 힘들수록 이분들은 더 배고플까봐 메뉴를 더 늘렸어요."
 
노숙인들에게 끼니는 가장 중요한 일과이자, 삶의 전부일 수 있다는 의미로 읽혔다.
 
밥을 받아들고는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 나눠 앉아 도란도란 식사를 하는 노숙인들. 도시락용기의 칸을 모두 비우는 데 10여 분이면 충분했다. 그런 뒤 하나둘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노숙 '저녁 맛집' 수원역, 인원 2배 '문전성시'

 
저녁 7시쯤 또다시 정나눔터에 어둠과 함께 그들이 돌아왔다. 이번엔 건물 바깥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150여 명으로 아침 식수인원의 두 배 남짓이다.
 
음식이 도착하자 '안식구'로 불리는 노숙인들이 밥통을 나르고 식기 준비를 하며 배식 봉사에 손을 보탰다. 아침보다 양도 종류도 갑절은 돼보였다.
 
저녁이 되면서 다시 밥을 먹기 위해 노숙인들이 수원역 정나눔터에 몰려들고 있는 모습. 박창주 기자

배식대에 오른 반찬은 매콤하게 무친 미역무침과 무말랭이, 야무지게 조린 콩자반과 마늘장아찌. 찜통에 담긴 밥과 김칫국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식판 가득 음식을 담은 이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밥을 국에 말거나 반찬들과 비벼가며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먹다가도 유리문 밖의 긴 행렬을 힐끗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빈자리가 나올 때마다 밖에서는 차례로 한 명씩 급식소로 들어와 식판을 들었다. 재촉하거나 실랑이하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식판전쟁'이 이어졌다.
 
저녁 시간 정나눔터에 노숙인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자리가 부족해 밖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한 노숙인. 박창주 기자

수원역 무료급식소는 노숙인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통한다. 특정 요일 점심을 제외하고는 하루 세끼를 주는 데다, 저녁에는 반찬도 많아 만찬을 즐기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1호선을 타고 저녁 먹으러 왔다는 한 60대 노숙인은 "추울 때 배라도 가득 채워야 잠이 잘 온다""배부르게 먹었으니 배 꺼지기 전에 자러가야 한다"고 역사 안으로 돌아갔다.
 

고물가 늪에도…"고기반찬 못 줘 미안해"

 
최근 고물가 여파로 노숙인들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봉사단체들도 시름이 이만저만 아니다. 두 달 사이 4㎏ 반찬 한 통 가격이 기존 15만 원에서 20만 원 이상으로 크게 올랐다.
 
그럼에도 단체 관계자들은 "더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수원지역에서 십수 년 노숙인들을 위해 저녁밥을 퍼 온 백점규(70) 목사는 "이 사람들에게 한끼는 곧 생명"이라며 "잘 못 먹어 몸이 약해지면 병에 걸리기 쉽다"고 말했다. 백 목사는 15년 전 한 청소년 노숙인이 숨졌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처음 주걱을 들었다.
 
노숙인들을 혐오하는 시선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일갈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여기까지 밀려왔는데, 사정을 듣기 힘들 정도로 기구한 인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가족처럼 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들 역시 사회의 일부분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백 목사는 "몇 달 동안 반찬이 많이 부실해져 식구들이 배가 금방 꺼지진 않을까 걱정"이라며 이날도 고기반찬을 차리지 못해 미안해했다.
 
정나눔터 배식대에 저녁 식사가 준비되고 있는 모습. 박창주 기자

노숙인들을 위한 공짜밥은 대부분 민간단체의 후원으로 제공된다. 국가나 지자체 도움을 받기 힘든 현실이다. 노숙인을 향한 왜곡된 시선이 지원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지적이다.
 
수원시의 한 노숙인 지원단체 관계자는 "주민 인식이 부정적이어서 공공기관들이 지원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국가 보조금을 받는 급식소는 극히 일부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인 만큼 최하층에 낙오돼 있는 사회 구성원을 위해 정부 차원의 대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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