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사진은 참 좋다. 특히 삶의 질곡에 빠져 있을 때 보는 우주사진은 신비와 이상이 느껴진다. 부러졌거나 접혔던 마음이 곧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게 끝이 아니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 희망이 비록 도달할 수 없는 '부조리극'이라 해도 상관없다. '희망 없는' 불모(Barren)의 희망을 가졌을 때 오히려 삶의 용기가 필요함을 되뇌곤 한다.
조간신문에 일제히 동일한 사진이 게재되었다. 신문들도 우주 사진은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달 탐사 전 다누리가 찍은 사진이다. 달 상공 344km를 비행하다가 찍어 항우연에 보내온 사진이다. 황량한 달 지평선 위로 떠오른 푸른 행성 지구의 모습이 기막히게 잡혔다. 안타까운 것은 흑백사진이다. 흑백이지만 다누리 사진을 보는 순간, 뇌 이미지는 푸른 지구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그동안은 지구에서 달만 바라보았다. 반대로 달에서 지구를 보는 현실이 신기할 뿐이다. 지난 추석 명절, 고향에서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토끼가 절구질을 하던 곳을 찾아보았다. 예전 같지 않았다. 시골구석이지만 도처에 가로등들이 있다. 빛이 밝아 수십 년 전 같은 하늘을 감상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봤는데, 오늘 아침 달 위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상념이 교차한다. '역지사지'라 해야 할지, '과학의 업적'이라 해야 할지 쓸데없는 생각에 미치고 말았다.
세밑 조세희 선생이 작고한 소식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추모했다. 조세희 선생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집필하고 다른 책을 쓰지 못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난쏘공'은 불출인 내가 봐도 위대한 작품이다. 70년대 이야기지만 2023년에 봐도 전혀 옛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조세희 선생이 써나간 글자, 단어 하나하나가 한 땀 한 땀 피와 땀의 노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야기는 단순히 사회 하층민, 빈민 노동자들의 고발 소설이 아니다. '난쏘공'에는 위대한 문학과 철학정신이 깊이깊이 고여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난장이의 우주에 대한 꿈 이야기다. 난장이는 키 117cm. 몸무게 32kg이다. 도시 철거민이요, 끝갈 곳 없이 막장으로 내몰려지는 일용직 인생이다. 입에 풀칠하려고 수도 수리공이 되었지만 동네 경쟁자인 철물점 상인에게 죽도록 얻어터진다. 오직 죽음 뿐이었고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달에서 천문대 일을 보고 싶어했다. 달은 순수한 세계였고 지구는 불순한 세계였다. 사실 고발을 넘어서 우주를 끌어들인 문학성이 너무 좋았다.
70년대 난장이와 곱추가 겪는 세상은 2023년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사회적 양극화와 '법'을 가진 사람들의 우월성은 형태와 내용을 달리할 뿐 본질은 존속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사실성은 영화 '기생충'에서 훨씬 적나라하다. 벌레 같은 인간. '난쏘공'에서도 난장이 가족들은 자신이 '벌레'라 생각했다. 어떤 존엄도 없는 인생이다. 벌레는 생명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삶이다. '기생충'에서는 '선은 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엊그제 윤석열 대통령 신년회에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대통령에게 '난쏘공'을 선물했다. 이 대표는 책 속에 편지도 끼워 넣었다. 공개된 편지에서 이 대표는 이렇게 적었다. "얼마 전 타계하신 조세희 선생님의 소설 '난쏘공'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한번쯤은 읽어보셨겠지만, 그 책에는 1970년대의 가난한 철거민 가족이 나옵니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철거 계고장 앞에 동생이 분노하자 형이 말합니다. "그만 둬, 그들 옆에 법이 있다." 이 대표는 대통령께서 법치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 것이고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법치주의는 법 자체가 정당하기에 지키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의 삶을 보호하는 도구라고 전했다.
정부가 화물연대 파업을 '분쇄'한 것을 계기로 대통령 지지율이 올랐다. 지지층이 움직였고 대통령은 탄력을 받았다. 대통령은 이참에 '법'으로 '법치주의'로 노동개혁을 해내겠다고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이미 고용부, 공정위가 나섰다. 조만간 검찰, 경찰도 노동수사를 할 모양이다. 70년대 법으로 탄압하다가 한계에 직면했다. 그 사이 수많은 분신이 있었다, 투신이 있었다. 과로사가 있었다. 중대재해가 있었다. 단식이 있었다. 반향 없는 외침들이 있었다. 그 이후 역대 정부는 사회적 갈등 속에서도 노동관계를 대화와 타협 기조로 유지해 왔다. 그런데 2023년에 법으로, 공권력으로 다시 노동을 개혁하겠다고 한다. 노동은 문화이고 환경이고 그 시대 삶의 총체, 총화가 얽힌 문제인데 말이다.
조세희 선생은 '난쏘공'의 처음과 끝에 '뫼비우스의 띠' 이야기를 정렬시켰다. 그것은 '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이 책의 철학이라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겉이 하나다. 안과 겉을 구분할 수 없다. 세상은 띠처럼 선과 악 두 가지로 구분 짓기 힘들다. 노동 갈등에 문제가 있다면 사회의 총체적 문제가 모두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혁이 필요하다. 제도는 현실과 조화되도록 늘 고치고 늘 수정하고 변경해야 한다.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 대통령에게 우려하는 것은 '노동 개혁' 수단으로 '공권력'만 있다는 것이다. 노동이 '깡패'처럼 때려 잡으면 해치울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