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용산 이태원 참사와 '돈룩업'

지난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유실물센터에 유실물들이 놓여 있다. 류영주 기자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실내체육관에 수거된 주인 잃은 신발 사진을 보는 것은 참혹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발은 웅변한다. 빨간 단화이든, 검은 단화이든, 검정 구두이든, 하얀 운동화이든, 분홍색 크록스 신발이든…

그 신발들은 처참한 참극 당시 상황을 제각각 말해준다. 서로 포개어 밟히며 처참했을 현장 상황을 사실 그대로 남기고 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얼룩진 신발들, 그 신발은 생명이 없는 물체여서 밟히고 뭉개졌지만 살아 남았을 따름이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압사사고가 발생한 현장의 전 상황으로 사람들이 밀려다닐 정도로 밀집된 모습. 연합뉴스

참사 희생자들 사연이 전해진다. 헤어디자이너로서 수습을 버텨내고 디자이너 실장이 됐던 딸, 엄마, 이모와 함께 가면 구경 나왔다가 희생당한 중학생,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에 왔다가 사고를 피하지 못한 20대 대학생, 300명 가까이 되는 희생자와 부상자 모두 주변의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 우주의 먼지가 되어 돌아간 희생자와 가족에게 무슨, 어떤 위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정말 숨이 막힌다. 고인들의 명복을 위해 기도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태원 참극 뒤에 또 한편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그 비극은 '영혼이 없는 행동'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태원에 왜 갔느니, 핼러윈 행사가 뭐라고..' 하는 개탄과 탄식은 백 번을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그 인식이 그러한 것을 어쩌겠는가. 때로는 앎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고 한다. 혐오와 관용이 없는 행동은 '교육'으로 다루기 어렵다고 한다.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행동이 오히려 '역풍'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편향'은 교육으로 좀체 고치기 어렵다는 얘기다.

류영주 기자·박종민 기자·용산구 제공

애도기간을 국가가 설정하고 사태 수습에 나선 정부 고위관료들을 뉴스에서 지켜보는 일이 몹시 괴로웠다. 마치 워킹볼 속에 갇힌 느낌이라 할까. 질식할 것처럼. 그 영혼 없는 비극의 포문을 연 사람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었다. 그 분에게 참사는 단순히 불운했던 '군중 집단사고'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고, 경찰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서울시내 곳곳의 소요·시위 때문에 경찰 경비 병력이 분산됐다." 대체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인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종민 기자

다음 날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 선동적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얘기라고 했다. 그렇다. 그에겐 '국가에 대한 책임 요구'가 가장 두려운 것이었나 보다. 섣불리 국가 책임을 요구하는 일은 선동적 주장이라는 논리가 그렇지 않을까. 그것은 안전 부서를 책임지는 그에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전선'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전선'이라는 것은 국민들에게 대체 무엇일까. 허망하고 선도 분명치 않은 그 '전선'은 넘지 말아야 하는 가시철선일까. 정권의 지킴선일까. 아니면 어떤 금기의 선일까. 그렇다면 희생자와 가족들의 슬픔과 비통 그리고 국민들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는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야 한다는 말인가.
 
한덕수 국무총리. 연합뉴스

또 한편의 영혼 없는 비극의 주인공은 한덕수 국무총리 였다. 그에게 이번 참극의 원인은 오로지 부재한 제도 밖에는 없는 듯 했다. "충분한 제도적 뒷받침과 여기에 대한 체계적인 노력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140분 간 외신 기자 앞에서 그가 반복했던 말은 '정부의 무한 책임' 이었다. 그 '무한'이라는 말에는 끝이 없다. 거기에 선도 없고 그어져 할 전선도 없었다. 그냥 무한대이다. 모든 것은 '0'의 세계로 수렴된다는 논리란 말인가. 참사 원인과 대처에서 가려져야 할 책임이라는 것은 필요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원인이 존재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제도'일 뿐일 테니까. 장관과 일맥상통한다. '영혼 없는' 총리는 동시통역 기기 음성 전송에 문제가 생기자 "잘 안 들리는 것의 책임져야 할 사람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요"라고 농담과 웃음을 던졌다.
 
박희영 용산구청장. 연합뉴스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영혼없는 비극도 오십보 백보다. 이 분은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핼러윈 축제는 명확한 주최 측이 없는 만큼 축제가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사회과학자(?)와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하나의 '현상'이란 무엇인가. 구청에서도 살펴봐야 할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책임이라는 말 자체가 애초 성립하지 않는다는 강변을 내놓고 싶었던 걸까. 사나흘 간 계속된 고위 공직자들의 영혼 없는 비극은 영화 '돈룩업'을 회상시킨다. 위를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국가가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지 말라는 메시지인 것 같다, 우연의 불행한 집단사고라는 생각을 부지불식간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영혼 없는 일들이 반복됐을 리가 없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압사 사고 희생자 추모 공간에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위 공직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직간접적 책임 유무를 떠나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책임지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참극 속에서 그들의 영혼 없는 비극을 봐야 하는 국민도 괴롭고, 그러잖아도 갈 길 모르고 헤맬 영혼들의 안식을 위해서도 그렇다. 원통함이 쌓이고 원성이 더 높아질수록 국정에 짐만 된다. 이 순간, 책임만이 무능함을 조금이라도 덮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의 공직은 신이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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