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영국 여왕 장례식과 유엔총회 등을 무대로 본격적인 순방외교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거의 아무런 성과가 없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안게 됐다.
교통정체 등의 이유로 고인을 참배하지 못한 의전 미숙에 이어 "흔쾌히 합의했다"던 한일 정상회담은 성사 여부조차 불투명할 만큼 진통을 거듭한 끝에야 겨우 이뤄졌다.
그것도 윤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찾아가 별 내용 없는 약식회담을 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만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굴욕 외교' 비판에 직면했다.
한국산 전기차 차별과 통화 스와프 문제 등을 풀어야 했던 한미 정상회담도 48초짜리 환담으로 끝났다. 어려운 경제 여건과 우리 전략산업의 미래를 감안하면 매우 절박한 과제였다.
◇ 英 조문외교 잡음, 유엔 빈손외교 논란에 이어 '이 XX' 외교참사
그나마 여기까지는 '빈손 외교' 수준이었지만 막판에 비현실적인 대형 악재가 돌출하면서 판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한국 대통령이 참모들과의 대화이긴 하나 공개된 장소에서 "이 XX" 등의 비속어를 쏟아낸 것은 귀를 의심케 할 만큼 극히 이례적 사건이다.
더구나 이 발언은 미국 의회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외교 참사'라는 야당의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아 보인다. 전기차 문제를 시정하려면 미 의회의 협조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발언의 맥락에 따라서는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결례로도 볼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수습이 쉽지 않고, 말 한 마디에 엄청난 외교적 부채를 짊어진 셈이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2일 "빈손외교, 비굴외교에 이어 윤 대통령의 막말 사고 외교로 대한민국의 국격까지 크게 실추됐다"며 "혹을 떼진 못하고 오히려 붙이고 온 격"이라고 비판했다.
◇ 日 기시다는 안보리 진출 포석, 김정은과 '조건없는 만남' 제안 눈길
이와 반대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외무상 경력의 노련미를 발휘하며 유엔 무대에서 존재감을 확보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분 삼아 유엔 안보리 개혁을 외치며 일본의 오랜 꿈인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런 기시다 총리에게 "높게 평가한다"며 안보리 개혁을 위한 양국 협력을 약속했다.
기시다 총리의 행보에서 더욱 주목할 점은 북한에 대한 유연한 메시지다. 그는 20일 연설에서 올해가 북일 평양선언 20주년임을 거론하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조건 없는 만남'을 제안했다.
북일 평양선언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양국관계 개선에 합의한 것을 말한다.
일본은 이미 1990년 가네마루 신 당시 부총리가 야당인 사회당 간부와 함께 전격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3당 선언을 발표하는 등 우리보다 훨씬 기민하게 움직였다.
◇ '회담을 위한 회담' 반대해온 정부 당혹…일본의 노림수 주목
일본은 미국보다 빨리 중국(중공)과 수교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미일동맹을 중시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율성을 확보하고 외교 공간을 넓히려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번에도 미국과의 밀착공조 하에 대북 강경‧압박으로 일관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태세 전환에 나섰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남북회담을 '정치 쇼'라 비판하고 북한과 '회담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윤석열 정부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외국 정상의 발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만 할 뿐 추가적 대응은 자제했다.
물론 아베 신조 총리 시절에도 일본은 북한에 조건 없는 만남을 몇차례 제의했다. 하지만 아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있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당시와 맥락이 다르다.
아베 총리가 북일관계 개선을 시도한 것은 2018년 이후 남북‧북미관계 급진전에 따른 고립을 우려한 측면이 크다.
뿐만 아니라 아베 총리는 2002년 당시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을 수행할 때 강경노선을 고집한 전력이 있어 북한이 신뢰하기 힘든 상대였다.
반면 기시다 총리는 상대적 온건파로 평가된다. 또 동북아 정세는 일본의 고립이 아니라 신냉전 구도로 바뀌고 있다. 유화적 대북접근 배경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 尹, 한일정상회담 성사에 급급…전문가 "30분 만나준 속셈 있을 것"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도 사전 기 싸움부터 밀어붙이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측면이 있다.
대통령실은 회담 개최에 "흔쾌히 합의했다"고 호기를 부렸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그렇다면 만나지 말자"는 일본의 능란한 외교술에 밀려 회담 개최에 만족해야 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22일 CBS에 출연해 "이번에는 한국 쪽의 얼굴을 세워줬으니 강제징용이나 지소미아 문제 등은 일본의 생각에 맞게 풀어줘야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 이번에 기시다 총리가 30분간 만난 속셈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