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 피한 스토킹범, 결국 살해까지…잠정조치 4호는 '유명무실'

스토킹범죄, 구속영장 사유만이 아닌 '피해자 위해' 가능성도 따져야
'피해자 불원' 한 마디에 무용지물 되는 피해자 보호 조치
경찰청장 "유치장 가두는 잠정조치 4호 적극 활용"…현실에선 기각률 높아

진보당이 16일 '역무원 스토킹 피살 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아 추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서울 지하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순찰을 돌던 20대 여성 역무원이 살해 당한 사건을 두고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피의자 30대 전모씨는 피해자와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로 2019년 말부터 350여 차례 만남을 강요하는 연락을 하고 협박을 하는 등 지속적인 스토킹 범죄를 벌여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수년간 스토킹에 시달려왔던 피해자에 대한 보호 대책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터져 나오고 있다. 또다시 스토킹 범죄가 단초가 된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가해자를 유치장 유치 또는 구치소 수감이 가능한 잠정조치 4호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다만, 잠정조치 4호에 대한 기각률이 높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거 일정하다"고 구속영장 기각…피해자 위해 가능성 봐야

16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은 2019년 1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350여 차례 연락해 만남을 강요한 전씨에 대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스토킹 처벌법 시행 이후인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합의 종용 등을 담은 메시지를 20여 차례의 전달한 것에 대해선 스토킹 혐의를 적용해 올해 3월 전씨를 서울서부지검으로 송치했다.

피해자의 고소 이후 경찰은 전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당시 법원이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며 기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전씨는 스토킹 혐의 등으로 기소돼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던 중 1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 범행을 저질렀다.

16일 '역무원 스토킹 피살 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한 시민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피의자가 협박하는 상황이라면 피해자의 안전과 위해 우려를 반드시 고려했었어야 했는데 단순히 관행적으로 구속 사유만 본 것 같다"며 "법원이 피해자 주거지가 일정하다는 부분만 지나치게 보고 피해자와의 관계, 사건의 맥락이나 범죄의 중대성과 심각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놓쳤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떤 공감도 받지 못하는 판단"이라며 "법원이 구속영장 심사를 할 때 실수를 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영장 기각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지난 7일 경기 고양시에서 40대 남성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10대 여자 청소년을 흉기로 협박해 납치하려 한 일이 발생했지만, 이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도 기각돼 논란이 됐다. 당시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조영민 판사)는 "피의자가 도망하거나 재범할 우려가 적으며 피해자를 위해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에 부족하다"는 이유를 달았다.

형사소송법 70조 1항에 따르면 주거가 일정하지 않거나 증거 인멸할 우려가 있고 도망갈 우려가 있을 때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법원은 제1항의 구속사유를 심사함에 있어서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다만 법원만의 문제로 국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부장판사 출신의 A변호사는 "법원이 판단을 잘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판사에게 재범 위험성을 판단할만한 자료들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을 수 있다"며 "경찰이 스토킹 범죄 수사를 절도 사건 조사하듯이 하는 것보다는 기소나 공소 유지에 불필요 하더라도 잠정조치 여부의 판단 기준으로 삼기 위해 범행 이외의 정황 등 많은 자료를 수사 기록에 담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불원' 한 마디에 보호 조치 무용지물

지난 14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20대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남성 A씨(31)가 16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릴 영장실질심사 출석을 위해 남대문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A씨는 범행 전 약 3년간 피해자에게 만남 강요와 협박성 내용이 담긴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300통 이상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황진환 기자

스토킹처벌법 시행 1년에도 여전히 피해자 보호조치는 요원하다. 이번 신당역 피해자 역시 두 번의 고소에서 한 달간의 짧은 신변보호를 받았을 뿐. 피해자가 원치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조치는 받지 못했다. 한 차례 영장을 기각당한 경찰은 올해 초 피해자의 2차 고소 때는 아예 영장 신청 자체를 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고소 사건인 탓에 시간 피해자 진술에 의존할 밖에 없었고, 피해자가 (추가 보호조치는)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더 이상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며 "추가적인 위험성 또한 인정되지 않아 연장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좀 더 세밀하고 전문적인 스토킹 범죄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피해자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괜찮아서, 안심해서가 아니라 가해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고군분투하는 것"이라며 "수사기관이 피해자 입장에서 피해자가 느낄 분노, 공포, 두려움, 당혹감을 읽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경찰 수사와 일련의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가해자가 위축돼야 하는 게 맞지만 지금 시스템에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처벌 불원 의사를 밝히길 강요하고 있다"며 "지금의 시스템은 피해자 입만 바라 보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피해자는 자신을 보호할 수단으로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수사기관은 보호 제도를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해자 유치장 가두는 잠정조치 4호…기각률 높아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회의실 앞 복도에서 신당역 역무원 피살사건 피해자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윤창원 기자

논란이 불거지자 경찰청은 신당역에서 발생한 여성 역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지휘부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여성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무겁게 인식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면밀히 살펴보고 현행법상 가능한 유치장 유치(제4호)를 포함한 잠정조치를 적극 활용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스토킹 범죄 등의 잠정조치는 사건 경중에 따라 1호 서면 경고, 2호 피해자·주거지 등 100m 이내 접근 금지 3호 전기통신 이용 접근 금지, 4호 최대 한 달간 가해자 유치장 유치 또는 구치소 수감 등으로 나뉜다.

이중 4호는 유치장에 구금하는 강력한 조치인 만큼 필요성이 충분히 소명돼야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가해자 분리와 피해자 보호에 즉각적 효과가 있는 조치지만, 검찰과 법원 단계에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 반려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잠정조치는 스토킹처벌법에 따라 경찰이 검찰에 신청하고, 검찰이 법원에 청구하는 구조로, 영장 발부 절차와 구조가 같다.

16일 '역무원 스토킹 피살 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한 시민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경찰청과 법무부로부터 받은 '스토킹처벌법 시행 이후 잠정조치 신청 결과'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신청된 잠정조치 4호 500건 중 승인된 건은 225건(45%), 기각된 건은 275건(55%)이었다.

잠정조치에서 4호를 뺀 경찰 신청 건수, 즉 2호, 3호, 2·3호를 합친 경찰의 잠정조치 신청 건수는 3373건으로, 이중 검찰 기각률은 6.28%(212건), 법원 결정이 나지 않은 비율은 8.47%(286건)로 나타났다. 잠정조치 4호 기각률이 그만큼 높은 셈이다.  

잠정조치 4호는 현실에서 '유명무실화' 되는 양상이다. 지난달 4일 서울 은평구에서 헤어진 여자친구 집에 수시로 찾아가고 칼로 현관문을 훼손하거나 틈 사이에 꽂아 놓는 등의 행위를 한 남성이 붙잡혔다. 당시 경찰은 가해자가 피해자 주거지에서 불과 700m 떨어진 곳에 산다는 점을 확인해 잠정조치 4호를 신청했으나, 검찰은 남성이 초범이라는 이유로 기각시켰다. 이후 경찰은 증거자료 확보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지난 2일 중랑구 면목역공원에서 무차별 폭행을 가한 끝에 피해자를 숨지게 한 60대 남성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피의자는 선행범죄로 또 다른 피해여성을 스토킹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경찰은 최초 범행 예방 목적으로 잠정조치 4호를 포함해 2호, 3호를 신청했었다. 경찰은 담당 검사가 구두 지시로 "잠정조치 4호는 구속영장보다 센 조치이므로 기각하겠다"고 해 이후 4호를 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에 검찰 측은 △대면 스토킹이 없던 점 △피의자의 폭력 전과가 없던 점 △피해자가 구금 조치까지는 원하지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해 잠정조치 4호에 대한 보강 요구를 했지만, 경찰이 4호에 대한 보강 없이 2, 3호만 다시 신청했다는 입장을 냈다.

전문가들은 잠정조치 4호의 실효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신 제한의 정도가 크지만 범죄 피해 우려를 감안해 사전에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신속성을 위해선 현재 영장 신청과 동일한 구조도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 한 변호사는 "스토킹 범죄들이 대개 신속성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검찰을 거치는 과정에서 때를 놓칠 수 있다고 보여진다"며 "경찰이 검찰을 거치는 기간을 단축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고 밝혔다.

올해 초 남구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잠정조치 결정 구조는 현재 사실상 영장과 다름없는 절차"라며 "검찰에 신청하고 법원에 청구하는 구조라서 사안에 따라 즉각 조치를 못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영장과 달리 법원에 (경찰이) 신청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검찰 측에서 영장 청구권 확보의 '지렛대'로 쓰려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일어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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