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 버스 노선 휠체어 탑승 설비 설치 2심 판결은 잘못"
지체장애·뇌병변장애 등을 겪은 A씨 등은 2014년 "시외버스·고속버스 등에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라"며 차별구제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교통약자법·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취지였다.
A씨 등은 버스회사를 상대로는 저상버스를 도입하고 휠체어 승강설비를 설치해줄 것을, 서울시와 경기도 등을 상대로는 각각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에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사항을 포함하고 휠체어 승강설비가 설치될 수 있도록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휠체어 승강설비'는 휠체어 이용자가 버스에 승하차할 수 있도록 하는 설비로 휠체어 탑승자를 태우고 상하로 움직이는 '리프트'와 버스와 외부 인도를 연결하는 '경사판'이 포함된다. '저상버스'는 일반 버스에 비해 차량 실내 바닥이 낮고, 승하차용 계단이 없는 대신 휠체어 탑승설비인 경사판이 설치된 버스다.
1심은 "버스회사들은 A씨 등이 버스를 승하차하는 경우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정당한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며 "버스회사들이 각각 시외버스와 시내버스에 휠체어 승강설비 등 승하차 편의를 제공하라"고 판시했다. 다만, 국가와 서울시 등을 대상으로 한 청구는 기각했다. 2심도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버스회사가 휠체어 탑승 설비를 제공하지 않은 것은 차별 행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교통 사업자에게는 버스에 휠체어 탑승 설비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며 "누구든지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에 이르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차별 금지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버스회사들이 즉시 모든 버스 노선에 휠체어 탑승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고 판결한 원심의 판단은 재량을 벗어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버스회사들은 즉시 운행하는 버스에 휠체어 탑승 설비를 설치해야 하는데, 현실성을 따져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원심은 휠체어 탑승 설비 제공 비용 마련을 위한 인적·물적 지원 규모 등을 심리해 이를 토대로 대상 버스와 그 의무 이행기 등을 정했어야 한다"며 "피고 버스회사들에 즉시 모든 버스에 휠체어 탑승 설비를 제공하도록 명한 원심 판결에는 법원의 적극적 조치 판결에 관한 재량의 한계를 벗어난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했다.
휠체어 탑승 설비와 달리 저상버스 제공은 현행 교통약자법 등을 볼 때 버스업체의 의무가 아니라는 대법원의 판단도 내려졌다. 재판부는 "법령에 승·하차 편의를 위한 휠체어 탑승 설비 설치 규정만 있을 뿐 저상버스 도입 규정은 없고, 고속 구간이 많은 시외버스나 광역형 시내버스에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것은 안전성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A씨 등이 주장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도, 감독 소홀도 그 자체로 차별 행위는 아니라고 봤다.
소송 8년 만에 대법원 판단…장애인 이동권 완전 보장까지는 갈 길 멀어
이번 소송은 지난 2014년 3월 시작돼 만 8년 만에 대법원의 판단을 받았다. 1심과 2심은 두 버스회사에 휠체어 탑승 설비 제공 명령은 했지만 저상버스 설치 등 청구는 기각했다. 처음 소송을 냈을 당시 장애인단체들은 시내버스 중 저상버스 비율이 17.5%에 불과하고 광역·시외버스 가운데는 한 대도 없다고 지적했었다.8년이 지났지만 장애인 이동권이 완전히 보장되기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저상버스 비중이 그나마 늘어난 시내버스는 2020년 기준 27.8%의 도입률을 나타냈지만,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휠체어 탑승이 힘들다.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교통약자법 개정안에서도 저상버스 의무 도입은 시내버스와 마을버스에 한정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장애인 이동권의 핵심인 휠체어 탑승 설비·저상버스 제공 의무와 관련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주요 쟁점을 대법원이 판단한 최초 사례"라고 의미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