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에서 10년 넘게 육계농장을 운영해 온 A씨. 그는 한 달여 전 그날을 잊지 못 한다. 농장에 들이닥친 20여명의 방역 관계자들은 하얀색 방호복을 입었지만, 그에겐 저승사자였다.
그들의 손에 애써 키운 토종닭 3만 5천여마리가 산 채로 땅속에 묻혔다.
다른 농장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했는데 A씨의 농장이 반경 3㎞ 안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공포의 3㎞'에 갇힌 가금농장…강제 살처분
1일 AI 중앙사고수습본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AI가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2천만 마리가 넘는 닭과 오리 등 가금류가 살처분됐다.
최악의 AI 피해를 기록했던 지난 2016~2017년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역대 2번째 살처분 기록을 이미 뛰어넘었다.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는 살처분 규모에 관련 업계에서는 '과잉 살처분' 논란이 일고 있다.
과잉 방역 논란의 배경에는 2018년 확진농가 반경 500m로 제한됐던 예방적 살처분 기준을 3㎞로 확대한 AI 긴급행동지침(SOP)이 있다.
전파력, 농장 형태, 지형적 여건 등에 따라 범위와 시행 여부를 조정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무차별적인 예방적 살처분이 이뤄지고 있다.
이에 화성과 용인, 남양주 등지의 일부 가금류 농가들은 예방적 살처분을 거부하고 나섰다.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켜 왔고 AI가 발생한 적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특히 신속 진단키트를 이용하면 몇 시간 내에 AI 감염 여부를 진단할 수 있는 만큼, 살처분 원칙만을 내세우는 것은 과도한 방역 조치라는 입장이다.
A씨는 "100% 제대로 된 보상도 해주지 않으면서 무조건적인 예방적 살처분은 너무 한 것 같다"며 "좀 더 상황에 맞는 방역 조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살처분이 최선" vs "행정편의, 정밀 조사부터"
방역 당국 한 관계자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역 조치"라며 "농장간 형평성을 위해 살처분 적용에 예외를 두긴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과도한 예방적 살처분이 감염 대상부터 없애고 보자는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서울대 수의학과 최강석 교수는 "탄력적으로 살처분할 수 있는 조항이 있는데도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여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며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 측면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 교수는 "대부분 야생철새에서 감염되는 만큼 경로를 정밀 조사해 살처분 기준을 세분화해야 된다"면서 "사육 밀집도와 감염 위험성이 낮은 농장에는 살처분 적용에 융통성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가금수의사회 윤종웅 회장도 "특정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이를 고려해 발생 농가를 중심으로 핀셋 살처분하는 게 맞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윤 회장은 "강제 살처분 기준이 과거 반경 500m에서 3㎞ 이내로 바뀌면서 면적상으로는 36배가 증가했다"며 "AI는 사람에게 전파되는 경우가 흔하진 않아 무리하게 살처분만 내세우기 보다는 감염 확산에 접어들기 전에 백신 접종부터 확대했어야 됐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