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직장에서의 갑질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27일 직장갑질119는 올해 1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 들어온 신원이 확인된 이메일 제보 가운데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2849개 중 10개 사례를 '갑질 대상'으로 선정했다.
△양진호상(폭행) △박찬주상(잡일 지시) △조현민상(원청 갑질) △쌍욕대상(폭언) △모욕대상(모욕 갑질) △엽기대상(엽기 갑질) △훔쳐보상(CCTV 감시) △막말대상(막말 갑질) △황당무상(황당 갑질) △갑질대상(종합 갑질) 등이다.
◇폭행(양진호상)
#1. 상사는 차에 같이 타고 있을 때 제 머리를 손으로 두 차례 가격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실수했다는 이유로 "XX 새끼야 왜 그랬냐? 한숨 쉬냐. 죽을래?"와 같은 폭언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정시에 퇴근했다는 이유로 전화를 걸어 "칼퇴했네? 할 일이 없어 퇴근했냐? 그만두고 싶지? 그만두게 해줄게"라며 폭언을 했습니다. 무서워서 더 이상 회사를 못 다니겠습니다.
◇잡일 지시(박찬주상)
#2. 매달 야외활동이라는 명목으로 1박 2일로 회장님 별장에 가서 울타리 공사, 엘이디 전등 교체를 하고 김장을 하고 밭도 맵니다. 다음날 오전 세면대 수리, 비데 설치 일까지 하고 나서 본사로 돌아옵니다. 예전에도 고용노동부에 신고당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잠잠해지니 회사 전체 직원들에게 이런 업무 외적인 노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해야 하나요?
◇원청 갑질(조현민상)
#3. 공공기관에서 시설관리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담당 주무관님은 업무와 무관한 일인데 정원에 화단을 새로 꾸미라고 하고, 근무 시간에 차를 고치러 가는데 심심하다며 용역업체 직원을 데리고 갑니다. 직원을 뽑을 때 직접 채용에 개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한 직원을 그만두게 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용역업체 직원을 명찰로 툭툭 치고, 여직원에게 마담이라며 성희롱 발언도 했습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고용 승계가 안 될까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이유로 직원들에게 6개월간의 무급휴직·무임금 노동 강요 △수당 및 인센티브 지급, 월급 인상 약속 불이행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위조, 수당 미지급·계열사 부당 업무 지시 △4대 보험 가입·연차휴가 사용 등을 막은 행위 △업무 시간 외 카톡으로 일 지시 △직원 동의 없이 CCTV 설치·감시 △여직원 성희롱 및 수시로 밤에 연락, 개인적 만남 요구 △직원 수시 해고·협박 △미등록 이주노동자 고용·착취 등이다.
'화장실 순번제' 갑질을 부린 원·하청업체도 있다. 콜센터 상담원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본인 순서가 올 때까지 참아야 했다. 팀원 한 명씩 돌아가면서 화장실을 가도록 회사가 규제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화장실 이용 시간은 10분 내로 제한돼 있다. "배가 아파서 12분이 걸린 직원은 혼나고, 다른 직원이 가 있는데 급해서 '화장실'이라고 메신저에 치고 가면 두 명 갔다고 뭐라 해요…" 상담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감점 요인이 된다. 상담원들은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다.
대기업 화장품 회사B는 모욕 대상(모욕 갑질)에 이름을 올렸다. 한 점장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실수한 돈을 물어내라며 "알바 써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 야, 너 같은 걸 돈 주고 써줬으면 바닥에 엎어져 절이라도 해"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이 회사는 주휴수당 지급을 피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이 여러 지점에 돌아가며 근무하도록 했다.
엽기 대상(엽기 갑질)에는 건설사C 직원이 꼽혔다. 제보자는 "반장이 다른 직원에게 장난이라며 엉덩이에 성기를 비비고, 사다리를 타고 일하는데 사다리를 발로 걷어 차서 직원이 그만 뒀다"며 "시도때도 없이 욕하고 신경질을 낸다. 휴일에도 갑자기 전화해서 일을 시킨다"고 했다. 현장소장에게 이야기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군대 안 갔다왔냐. 남자들 다 그런다. 그냥 무시해라"였다. 소장에게 이야기한 뒤 반장의 '갈굼'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직장갑질119는 이 같은 갑질이 '반쪽짜리 갑질금지법' 때문이라고 짚었다. 현행 근로기준법으로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의 갑질 등을 처벌할 근거 규정이 없고, 원청 직원들이 '갑'의 지위를 이용해 하청이나 협력업체 직원들을 괴롭혀도 신고할 곳이 마땅치 않다.
직장갑질119 박점규 운영위원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피해 근로자에게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며 "법 위반 소지가 있는 내용을 근로감독관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문제"라고 말했다.
단체가 제시한 해결책은 △법 적용 범위 확대-사장 친인척, 원하청 관계, 아파트 입주민 등 사회통념상 상당한 지위를 가진 '특수관계인'과 5인 미만 사업장 등 △처벌조항 신설-가해자가 사용자나 사용자 친인척인 경우, 사용자가 신속히 조사하지 않은 경우, 피해자 보호나 가해자 징계 등 조치 의무사항을 지키지 않은 경우 △노동청 신고 확대-(갑질) 행위자가 사용자나 특수관계인인 경우, 신고했으나 조사·조치가 미흡한 경우 등이 있다.
아울러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된 근로자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최소 2차례 발생한 사업장을 대상으로 '불시 근로감독'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직장갑질119 권두섭 대표는 "필요한 개정안들은 모두 발의돼 있다. 정부 여당과 국회가 하루 빨리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보완하는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며 "노동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자아실현을 하는 공간이 직장이다. 2021년에는 직장의 노동 인권이 한발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