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수원에서 출생해 청소년시기에 교회에서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 후 일본 주오대학에서 유학했고 1909년 말경 귀국해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중·고)와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후진양성을 위해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3·1운동 준비모임에 참여하였고,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순회위원’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수원지역의 3·1운동을 기획 및 지도했다.
만세운동 참여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해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1941년에는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해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