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과 함께 오스카 '최초'의 역사를 쓴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 전 세계 관객에게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세계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영화로서가 아니라 한 편의 '영화'로서 말이다.
지난 10일(한국 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장편영화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은 그 자체로 역사가 됐다.
비(非)영어권 영화 최초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 수상한 역대 세 번째 작품, 역대 아시아 출신 감독 중 두 번째 감독상 수상, 아시아 영화 최초이자 비영어권 영화 중 6번째 각본상 수상, 작품상과 국제 장편영화상 최초 동시 수상 등 봉 감독과 '기생충'은 세계 영화사에 남을 대기록을 썼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 '설국열차' 등에서도 사회 비판적 시각과 장르 영화를 결합해 대중을 사로잡았다. '기생충'에서 빈부격차와 자본주의의 민낯을 바라보는 봉 감독의 시선은 더 깊어졌고, 블랙코미디와 버무린 연출은 인종과 문화를 가리지 않고 공감대를 끌어냈다.
봉 감독은 "'괴물'이나 '설국열차'에 SF적인 요소가 많았다면 '기생충'은 동시대를 그린,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앙상블이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로 그려냈다"며 "현실에 바탕을 둔 영화라 더 폭발력을 가진 게 아닐까 짐작한다"고 말했다.
이어 "스토리가 가진 우스꽝스러운 면도 있지만, 빈부격차가 극심한 현대사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씁쓸한 면이 있다"며 "관객들이 불편해 하고 싫어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화에 당의정(糖衣錠·겉으로는 좋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가 될 수 있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입히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해 솔직하게 그리려 했다"고 덧붙였다.
봉 감독과 함께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한진원 작가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으로 흘러가지 않고, 각 캐릭터에게 각자만의 드라마가 있고, 각자만의 욕망과 이유가 있다"며 "각자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다는 점, 그것이 플롯을 따라갈 때 색다른 즐거움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까지 약 6개월 동안 봉 감독과 스태프, 배우들은 아카데미 홍보전인 '오스카 캠페인'을 펼쳤다. 봉 감독은 이를 '게릴라전'이라고 표현했다. 거대 스튜디오와 넷플릭스의 대대적인 물량 공세 사이에서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뛰어다녔던 까닭이다. 봉 감독을 비롯한 '기생충' 팀이 한 인터뷰도 600회 이상, 관객과의 대화도 100회 이상이다.
봉 감독과 오스카 레이스를 함께 뛴 배우 송강호는 "지난 6개월은 최고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작품을 보면서 타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며 "나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위대한 예술가들을 통해 많은 걸 느낀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데뷔한 1999년 이후 20여 년간 한국 영화산업이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동시에 젊은 감독들이 모험적 시도를 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며 "독립영화와 메인스트림(주류·상업 영화)이 평행선을 이루는 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1980~90년대 붐을 일으킨 홍콩 영화산업이 어떻게 쇠퇴해 갔는지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지금 한국영화 산업계가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며 "영화가 가진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도전적인 영화를 더 많이 껴안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봉 감독은 차기작 준비에 관해서도 짤막하게 언급했다.
"오늘 아침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동안 수고했고, 나(마틴 스콜세지)도 그렇고 다들 차기작을 기다리니 조금만 쉬고 일하라고 했는데요.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몇 년 전부터 준비 중인 차기작도 '기생충'처럼 우리가 평소 해왔던 대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찍을 예정입니다. 뚜벅뚜벅 다음 작품 준비를 위한 길을 걸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