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압축성장의 중심 대우그룹, 해체의 굴곡까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자료사진)
한국경제 압축성장기의 중심에 섰던 대우는 1980~90년대 급성장으로 국내 재계 2위까지 올랐다가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고 2000년 4월 해체되기까지 굴곡의 세월을 보냈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직원 5명으로 1967년 문을 연 대우그룹은 섬유회사로 출발했다.

섬유회사 한성실업에서 일했던 만 30세 청년 김우중은 셔츠 내의류 원단을 동남아시아 등에 내다 팔았다.

김우중 전 회장의 수완과 수출진흥정책으로 탄력을 받은 대우실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여러 섬유회사를 비롯해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 등을 인수했다.

1973년 대우기계, 신성통상, 동양증권, 대우건설 등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했고, 1976년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와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다.

1974년 세운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더해 주력기업이 됐고, 1978년 대우자동차의 전신이 된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1983년 상호를 바꿨다.


전자, 금융, 건설, 중공업 등 분야로까지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대우는 1981년 출범했다. 그룹 회장제가 이때 도입됐다.

1990년대까지 성장 위주 전략을 폈다. 김 전 회장이 1993년 '세계 경영'을 선언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 개척에 공격적이었다.

대우실업에서 출발한지 30여년 만인 1998년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1999년 해체됐다. 대규모 분식회계도 적발돼 대우그룹은 회생불능이 됐다. 공중분해 이후 '대우'라는 이름을 쓰는 곳은 점점 사라졌다.

다만, 대우그룹 공채였던 대우맨들이 해마다 창립기념일인 3월22일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김 전 회장이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게 2017년 50주년과 지난해 51주년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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