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작 : 윤승훈 PD, 이윤상 아나운서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이상익 선생 (명동 위장결혼사건 당시 기독청년협의회 총무)
◆이상익> 네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김효영>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이상익> 지금은 경남 함안에서 새길동산 요양원이란 곳에서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김효영> 1979년 11월 24일. 명동 위장결혼사건.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상익> 전두환 신군부가 이름을 붙이기를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이라고 그랬는데 실제 정식 명칭은 '대통령 간접선거반대 국민총궐기대회'였죠.
◇김효영> 그렇군요.
◆이상익> 전두환 신군부가 이름이 거창하게 나가면 자기들이 위축되니까, 부도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위장결혼이다, 이런 일종의 닉네임 같은 그렇죠. 그렇게 되어있죠. 도대체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는게 말이되냐? 빼앗긴 주권을 국민한테 당연히 돌려내라. 그게 주 목적이 그것이었죠.
◇김효영> 박정희 사망 후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는데, 실제로는 전두환의 지휘하에 있었고.
◆이상익> 아, 그렇죠. 조종을 다 받고, 당시 최규하 권한대행은 로봇 역할을 했죠.
신군부에서 다 조종을 했었죠.
◇김효영> 간접선거로 전두환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뽑으려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김효영> 거기에 반대하는 집회를 한 겁니다.
◆이상익> 네. 최초죠. 신군부에 대한 최초의 항거였죠.
◇김효영> 신군부에 대한 최초의 항거.
◆이상익> 왜 위장 결혼식을 계획한 겁니까?
◆이상익> 그때는 누구든지 모일 수가 없었어요. 모든 시내에 군인과 경찰이 주둔하고 있었으니까. 모일 수가 없었죠. 도저히. 그래서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는 국민들에게 빼앗긴 주권을 내놓으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죠.
◇김효영> 그러면 청첩장도 돌렸습니까?
◆이상익> 당연하죠. 다 돌렸죠. 모든 것을.
◇김효영> 신랑 이름은 뭐였고 신부 이름은 뭐였습니까?
◆이상익> 그때 연세대 다녔던 홍승엽씨가 신랑이었고. 지금 돌아가셨죠. 신부가 윤정민인데.
◇김효영> 윤정민.
◆이상익> 그 당시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상임대표를 하셨던 윤영중 신부님이 계세요. 윤영중 신부님의 성을 따서 윤. 그 다음에 원래는 '윤민정'이에요. 그게 뭔가 하면 '민주 정부'입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신군부에서 눈치 챌까 싶어서 지혜롭게 한다고 '민정'을 뒤바꿔서 '정민'. 그래서 윤정민. 신부는 가상의 인물이고.
◇김효영> 그렇군요.
◇김효영> 작전을 잘 짜셨군요.
◆이상익> 네. 신경을 썼습니다, 하하.
◇김효영> 그리고,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까지는 했다면서요?
◆이상익>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까지 하고, 그 다음에 함석헌 선생님이 나오셔서 선언문 낭독을 했었죠. 그리고 구호를 외치는데, 문이 다 박살나면서 군인과 경찰이 쳐들어 와가지고 난타전을. 사전에 어느 정도 낌새를 차렸었다 라고 봐야 되겠죠.
◇김효영> 낌새를 차리고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드러나는 순간 들이닥쳤군요.
◆이상익> 네, 그렇죠. 아수라장이 되었죠.
◇김효영> 300명이 잡혀갔다면서요?
◆이상익> 예. 소위 말하는 보안대 서빙고로 끌려갔죠.
◇김효영> 그날 사건으로 잡혀가셨던 분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분들 많으시죠?
◆이상익> 많죠. 윤보선 대통령도 계셨고, 뭐 많이 계셨죠. 함석헌 선생님, 김명결 교수, 이재정 전임 통일부장관, 지금 경기도 교육감하시죠? 그분 신부였어요. 그 당시에. 등등 윤보선 대통령,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들은 연세가 많으셔서 불구속 기소가 되고. 지금 민주당 대표하는 이해찬 총리나 김상현 의원 등 이런 사람들은 경미하다고 해서 실컷 두들겨 맞고 조사만 받고 나가고. 그 다음에 주동자 11명이 최종 감옥을 갔죠.
◇김효영> 이상익 선생님도 구속이 됐고. 백기완 선생도 계셨습니까?
◆이상익> 예. 백기완 선생도 주동, 주모 중에 한 분이었으니까. 제일 많이 당한 분이 백기완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 아시다시피 성격이 굉장히 괄괄하시잖아요.
◇김효영> 괄괄하시죠.
◆이상익> 불의를 못 참고 거기서 네 이놈들, 하고 덤비다가 그 분은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라 몸무게가 84kg입니다. 그런데 40kg까지 몸이 쪼그라들었어요. 얼마나 당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서울구치소가서 대전교도소로 이전 갈 때 백기완 선생님만 못 갔었어요. 일어날 수조차, 옆에 간수가 끼어도 못 일어났으니까. 다 돌아가신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시지만은 다 많이 당했죠, 그 당시에는.
◇김효영> 이상익 선생님도 고문을 당했습니까?
이거 뭐 세세한 것 다 기억하기도 싫고 이야기 할 수 없는데 다들 기어서 다녔었어요. 서지를 못하니까. 지하에서 1층으로 수사를 받으러 다니는데 전부다 기어서 계단을 올라가고 기어서 내려오고 그랬죠. 심지어 화장실 가면 문을 활짝 열어놔요. 열어놓고 큰 것을 보든 작은 것을 보든 세어요. 하나, 둘. 그리고 열 번까지 셀 때 안 나오면 죽인다고 하고. 그러니까 대변이 나옵니까, 보고 있는데. 그래가지고 뭐 한 10일 동안 변을 못 봐가지고 변비 때문에...또 피를 쏟고 별 게 다 있었죠. 다들 뭐....
◇김효영> 얼마나.. 참.
◆이상익> 많이 당했었어요. 최열 형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 민간인으로서는 환경운동의 1인자잖아요?
◇김효영> 환경재단 이사장이시죠, 지금.
◆이상익> 예. 최열 같은 최 선배 같은 경우는 목소리는 분명히 맞는데 얼굴은 모르겠어요. 얼굴이 좌우로 비대칭으로 어그러져버렸어요. 얼마나 맞았던지 대부분들 그랬죠, 임채정 국회의장 하셨던, 임채정 선배 같은 경우도 눈 찢어지고 귀 찢어지고 뭐 다들 그랬어요. 함석헌 선생 같은 그런 연세 많으신 어르신 수염을 새파랗게 젊은 애들이 이렇게 손으로 획 휘감아서 확 잡아 땡길 정도로 뭐.
◇김효영> 그렇게 연세가 많으신 분의 수염까지 잡아 뜯을 정도로 악랄한 짓을.
그리고 얼마나 잡혀있다 나오신 겁니까?
◆이상익> 전부다 1년 8개월에서 3년까지 받았고 집행유예를 나가신 분들은 뭐 윤보선 아까 말했던 함석헌 선생, 이해찬 등등 다 그렇고. 그 다음에 8개월에서 3년까지 받았는데 전부다 1년 4개월 살고 저 같은 경우 두 달 남겨놓고 형 집행정지로 79년도 들어가서 81년도 나왔죠.
◆이상익> 네네.
◇김효영> 6월 항쟁은 1979년 11월 24일 명동에서 시작이 되었다. 이렇게 봐도 되겠군요?
◆이상익> 그것이 최초였으니까. 그것이 최초였으니까 역사적으로 그런 맥락이 저는 통한다고 봅니다. 그 기운들이. 그리고 그때 관여했던 사람들이 그 뒤에 곳곳 처소에서 다 그런 활동을 하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으니까.
◇김효영>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질서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는 것을 오늘 다시 뼈저리게 느끼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익> 네네. 감사합니다.
◇김효영> 끝으로 방송을 듣는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고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이상익> 네. 아직도 유신잔재나 적폐가 깨끗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어요. 일제잔재가 해결되지 않고 있듯이. 이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역사는 참 발전을 한다고 했는데 우리 역사의 속도는 참 너무 늦은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정의와 진실은 반드시, 정의는 밝혀지고 진실은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사회가 더 맑고 깨끗하게 저는 나간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런 기운을 몰아서 남북의 평화.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 하는 그런 기운으로 연결되리라고 보고 또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때 당시 고문 후유증 때문에 지금도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좀.
◆이상익> 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완전히는 그렇지 않고 뭐 초창기는 굉장히 심했죠. 뭐 차도 못 탈 정도로 울렁거렸으니까.
◇김효영> 부디 건강하셔서 선생님들께서 꿈꾸셨던 그날이 옴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상익> 네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도 많이 해주십시오.
◇김효영> 늘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상익> 네네. 감사합니다.
◇김효영> 지금까지 이상익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