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올인'했더니 보상 한 푼 없이 나가야…"모든 것 다 잃는 셈"
이모(46)씨는 약 3년 전 부인과 10년 넘는 직장생활로 알뜰살뜰 모은 돈에 대출금을 더해 작은 애견 미용샵을 차렸다.
첫 사업에 어려움이 컸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겨내고 자리잡아 겨우 허리를 필 즈음인 지난 6월 느닷없는 '퇴거 요청'이 시작됐다. 화곡 1구역에 재건축이 확정되면서 늦어도 연말까지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곳에 계약서를 쓰고 인테리어를 시작할 때 우연히 재건축 얘기를 듣고선 깜짝 놀라 집주인한테 물으니 '언제 할 지도 모르니 맘 편히 장사하라'고 해 자리잡았는데 이제 10월 말까지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임대차 보호법에서도 5년은 (세입자를) 보호하길래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3년 만에 나가라고 한다"며 "대출 껴 겨우 인테리어도 다 해놓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냥 나가라. 보상은 한 푼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셈이다"고 했다.
이씨와 비슷한 시기 작은 가게를 차린 30대 A씨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6월부터 그의 가게에는 "다들 나가는데 이 곳은 언제 닫냐", "안 나가서 고소당하면 변호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냐"는 쌀쌀한 인사를 건네는 '손님들'이 늘었다.
A씨는 "(이런 말들이) 겁을 주려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같은 말들을 하루에도 몇십번씩 들으니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면서 "일부는 '보상은 다 나라에서 해주는 게 아니냐'는 등 이곳에서 버티는 걸 '욕심'으로 착각해 더 상처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사를 가면 거래처도 바뀌고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셈이다"며 "4년 전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건데 그렇게 할 수는 없잖냐. 번 돈을 모두 투자해 시작한 장사인데 더더욱…"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동네에 터전을 잡은 지 오래된 세입자의 한숨은 더욱 깊다.
9년 째 미용일을 하는 40대 여성 신모씨는 지금도 넉넉하지 않은 벌이지만 그렇다고 겨우 자리 잡은 터전을 떠날 자신은 더더욱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용일은 입이 입을 통해 유명세를 타는 일이라 다른 직업들에 비해 다시 자리 잡기도 힘들다"며 "빚이라도 낼 수 있으면 내서 옮기겠는데 은행에서는 간이 영세업이라고 사업자 대출도 못 해준다고 하더라. 지인들한테 돈 500만원이라도 빌리지 못하면 새로 가게를 열 수 없는 상황이다"고 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신씨는 "생계가 어려워 아이를 시설에 맡겨 키웠는데 그 와중에 애가 많이 아파서 척수검사도 하고 며칠씩 입원까지 시키며 어렵게 길렀다"며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누가 수억을 바라냐. 기본적으로 인테리어나 내가 들인 돈에 대해서만 (재건축 조합에) 보상을 해달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며 "이런 얘기를 해보려고 조합에 '형편이 굉장히 어렵다. 다른 데 옮길 수 있는 여유자금만 해결되면 당장 나가려 한다'고 전화로 알려봐도 '법이 그렇다'는 대답만 돌아온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행법상 재개발 지역은 공익사업적 측면을 인정받아 이사비와 영업손실비용 등을 세입자에게 보상하지만 재건축 세입자는 별다른 보상을 받을 방법이 없다.
지난해 12월 재건축 지역인 아현2구역에서 철거민 박준경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뒤 서울시는 지난 4월 조합측이 세입자에게 보상하면 시가 용적률을 높여주는 등 조합측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조차 강제 조항은 아니라 여전히 실효성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이번 화곡 1구역 상가 세입자들이 실질적으로 보상 한 푼 없이 밀려나는 처지란 사실이 CBS노컷뉴스 보도로 알려지며 정부와 국회 그리고 서울시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맘상모(맘편히 장사하고픈 상인 모임) 쌔미 조직국장은 "현실적인 대안은 재건축도 재개발 수준의 보상을 하는 법개정 뿐인데 국회에서 논의가 멈춰있다"며 "현재 상가법에는 재건축과 관련된 보상에 대한 언급이 없어 관련 개정안이 다수 발의돼있지만 논의조차 안 되는 상황이다"고 지적했다.
한국도시연구소 이원호 책임연구원은 "재건축 세입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법개정이 돼야한다"며 "그 기간 동안 서울시는 강제력이 없더라도 조합이 세입자들에 대한 보상 논의를 할 수 있게 행정력을 동원해 설득하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