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발전과 우리말사전 탄생에 기여한 푸른 눈의 선교사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

이곳에서 '사전의 재발견'을 주제로 열리고 있는 전시에서는 최근 영화 '말모이'를 통해 주목받은 최초의 우리말 사전 '말모이'의 원고를 비롯해 그간 발간된 다양한 우리말 사전들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우리말사전의 탄생에 앞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발간한 사전들이 눈에 띈다.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사전의 재발견' 전시.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은 선교활동과 성경번역을 위해 한국어를 익혀야 했고, 이를 위해 다양한 이중어 사전들을 펴낸다.

이에 대해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덕주 은퇴 교수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첫번째 과제였던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한국어 어휘들을 영어로 어떻게 발음하고 표현하는지 공부하던 과제물이 바로 '사전'이었다"며, "자신보다 나중에 들어오는 후배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1880년 가톨릭 선교사 리델이 편찬한 최초의 근대적 이중어사전인 <한불자전>을 시작으로, 1990년에는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선교를 위해 만든 작은 크기의 사전인 <한영자전>이 발간됐다.

최초의 한영사전이자 영한사전인 이 <한영자전>은 후대 영한사전의 모태가 되었고, 한글의 연구와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언더우드는 이 사전과 함께 한국어 기초 문법서인 <한영문법>도 펴낸다.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운영과 김민지 학예연구사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찬한 한국어 사전과 문법서는 우리말 사전과 문법책이 없었던 시기에 만들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이후 한글 연구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언더우드와 <한영자전>을 함께 편찬했던 게일 선교사도 다양한 사전 집필과 번역으로 한국어 연구에 크게 기여한 언어학자다.

게일은 1897년, 한글과 영어, 한자를 함께 실은 대형사전 <한영자전>을 편찬한다.

독립신문에서는 이 <한영자전>을 두고, "조선사람 누구든지 조선말도 배우고 싶고 영어와 한문을 배우고 싶거든 이 책을 사서 조선 글자들을 어떻게 쓰는지 배우기를 바란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한영자전>의 1부는 한영사전으로, 약 3만 5천 개의 한국어 낱말들을 한자의 훈과 모음의 장단, 숙어와 반대어, 방언과 존칭어 등 지금까지 다른 사전엔 없었던 내용과 함께 정리됐고 2부는 중영사전으로, 한자 1만 1천여 개의 낱말을 순서대로 배열됐다.

이 <한영자전>의 1,2부를 따로 분리하고 개편해 1부 <한영자전>이 1911년, 2부 <중영사전>이 1914년에 다시 출간됐다.

이 개편본들은 그동안의 사전들에서 사용한 영어 알파벳 순서의 배열에서 변화를 줬다는데 의미가 크다. 최초로 단어의 배열 순서를 한글 자모순으로 바꿔 싣고, 인명과 지명 등의 낱말도 대규모로 추가하는 등 철저하게 한국어 위주의 사전으로 탈바꿈했다.

한글이 조선의 공식 문자가 된 1894년 직후, 한글 표기의 공통된 기준이 없어 혼란스런 당시 언더우드와 게일 선교사 등이 발간한 사전은 우리말과 글의 규범을 정리한 셈이 된 것이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관련 문서들을 모두 한글을 활용해 표기한 것도 한글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덕주 교수는 "초창기에 내한했던 선교사들은 한국의 문자가 지식인과 양반 계층이 사용하는 한자와 부녀자를 비롯한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는 한글로 이원화 된 것을 발견한다"며,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대상을 소외되고 억압받던 민중들로 택하고, 그들의 문자로 모든 선교 문서를 인쇄하는 정책을 펼쳤다"고 설명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그동안 묻혀있던 한글이 전면에 등장하며, 그 가치와 실용성을 인정받아 빛을 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외된 민중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과 소통하기 원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노력이 이젠 민족의 정신이 깃든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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