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법원 스스로 끝낼 수 있는 문제였나?

[기자의 창]특조단 3번 조사 결과 "블랙리스트는 없다"던 대법원
임종헌 공소장·내부 문건 등 '법관사찰' 정황 속속 드러나
단순 내부징계에서 그칠 수 있는 문제였을까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사법농단 의혹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가을, 서울고법의 판사 몇 분을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기자에게 "사법농단 사건은 (수사 협조가 아니라) 내부에서 빨리 징계절차에 착수해 마무리했어야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검찰 수사로 매일같이 새로 터져 나오는 재판개입 의혹에 사법부 위상이 끝도 없이 추락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조직을 지키려하는, 사법부에 20년 이상씩 몸담은 '고참' 판사의 입장이 한편으론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대법원이 3차례에 걸쳐 시행한 자체 조사에서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발표했는데도, 끝까지 의문을 제기한 여론에 밀려 검찰 강제수사를 받기에 이르렀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검찰 수사를 보면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없다"던 대전제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믿었던 대전제마저 흔들리니 사법부에 가졌던 일말의 측은함(?)마저 사라지는 기분입니다.

일단 지난 14일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을 보면, 법관을 사찰한 정황들이 약 35쪽에 걸쳐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또 검찰은 지난 6일 법원행정처를 압수수색하면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서'라는 제목의 문건 4년 치를 확보했는데, 이것이 사실상 법관을 사찰한 블랙리스트였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 문건에는 성추행 의혹이나 음주운전 사례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법관들이 적시돼 있는데, 여기에 당시 양승태사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법관들 이름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1심 판결을 공개 비판한 판사부터, 양 전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을 비판하는 글을 쓴 판사까지 모두 명단에 적혀있습니다.

이들 중엔 실제 중징계를 받거나, 인사에서 밀려난 판사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심지어 해당 문건은 블랙리스트 파문이 불거진 지난해 3월 이후부턴 작성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발표했던 겁니다.

여기에 지난 19일 전국법관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법농단에 연루된 현직 판사들에 대해 "징계절차 외 탄핵소추절차까지 함께 검토돼야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법관 내부에서조차 징계절차로 그쳐선 안 된다는 의견이 모아진 만큼, 결국 사법농단 의혹은 고참 판사님들의 생각과는 달리 애초 내부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다시 그 판사 분들을 만나면 묻고 싶습니다. 아직도 법원 내부에서 끝낼 문제였다고 생각하는지 말이죠.

차라리 "판사가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특조단의 말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원론적인 답변을 듣는다면 마음이 한결 놓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블랙리스트가 있는 걸 알면서도 '조직 보호' 차원에서 한 거짓말이었다면 그 배신감은 너무 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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