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참혹한 고통과 아픔을 남긴 한국 전쟁. 잔혹한 학살과 덧없는 죽음이 난무했던 전쟁터 속에서도 최후의 인간애는 존재했다. 전쟁 고아 '아일라'에게 아버지가 됐던 터키 군인 슐레이만의 실화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영화 '아일라'는 한국 전쟁에 파병된 슐레이만(이스마일 하지오글루 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슐레이만은 동료 군인들과 함께 북한 군우리에서 철수하며 충격에 말을 잃은 전쟁 고아를 발견하게 되고, 아이에게 터키어로 '달'이라는 의미의 '아일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렇게 말도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슐레이만과 아일라(김설 분)의 따뜻한 인연이 시작된다.
의무감과 연민에 아일라를 돌보기 시작했지만 생사를 오가는 전쟁터 속, 슐레이만 마음 깊은 곳에서 아일라의 자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아일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슐레이만의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이자 '희망'이 된다. 생김새도, 언어도 다르지만 자신을 '아버지'로 여기는 아일라의 순수한 애정은 슐레이만 인생에 새로운 시작점을 제시한다.
슐레이만은 아일라를 치유하고 돌보지만, 아일라 또한 슐레이만이 가진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하고 그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순간들을 나열하며 이들이 어떻게 서로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기게 됐는지 조명한다.
여전히 가슴 한 켠에 아일라를 담아 둔 슐레이만은 한국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아일라를 찾을 기회를 갖는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아일라는 두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어 있다. 아버지로서 아일라를 양육할 수도 없었고, 성장도 지켜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아일라에게는 슐레이만이 하나뿐인 아버지였다.
가장 척박한 순간에 기적은 일어난다. 적을 향해 겨눈 총부리, 끝없는 죽음과 살육 그리고 고통, 동료를 잃는 아픔 등 절망 한가운데서 슐레이만과 아일라는 서로를 발견했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었다. 생에 1년 남짓한 그 시간은 슐레이만과 아일라에게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말이 통하지 않아도, 참혹한 전장에서라도 인간은 얼마든지 서로를 사랑으로 감쌀 수 있는 존재다.
노쇠한 슐레이만과 반백의 머리를 한 아일라가 서로 포옹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순간, 우리는 어둠 속을 꿰뚫는 한줄기 빛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 미워하기 쉬운 세상에서 우리가 이미 잊었거나 잃어버린 감정들이 무심코 스쳐 지나간다.
영화는 실화에 충실해 다소 지루할 수 있어도, 자극적인 요소로 서사에 양념을 더하지 않는다. 전쟁 영화가 아니기에 전투 장면은 실감나게 재현되지 않는다. 다만 시간 순대로 착실히 따라가는 슐레이만과 아일라의 이야기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실화로 보는 이들의 가슴을 잔잔하게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