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골목길을 몇번 오르내리다 채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총장님! 사무실을 찾을 수가 없어요. 설명에 따르면 이 근방인데 어느 건물이죠?"
채 전 총장은 "잠깐 기다려라. 내가 나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오르막 골목길 저 쪽에서 채 전 총장 모습이 보였다. 4년 여만의 만남이었다. 반갑게 손을 마주 잡고 함박 웃었다. 4년 남짓의 세월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교차했다.
얼굴을 맞대고 그를 가까이서 본 건 서울고검장으로 검찰총장에 내정되기 직전이었다. 얼굴 표정이 환했고 4년 전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풍상'에 시달렸는데도 역시 '세월이 보약'이란 옛말이 '허언은 아니구나' 싶었다.
간판도 없는 3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채 전 총장은 대학 때부터 친구였던 이재순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서평(瑞平)'을 열었다. 그가 '찍어내기' 당하고 혼외자 문제로 고초를 겪는 동안 늘 함께 했던 친구였다.
그는 여전히 골초였다. 큰 창문이 있는 조그만 응접실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전히 담배를 많이 피우시네요 하하"라고 말을 건넸다.
그도 대답했다. "그렇게 자꾸 담배 얘기하면 나같은 '애연가'가 설 자리가 없어. 하하."
◇ 절정의 붉은 가을단풍 아래 홀로 선 남자가 눈길을 확 사로잡다
지난 4년간 그의 '잠행'과 '은둔 생활'에 대해 담소를 나눈 건 잠깐이었다. 그 순간 벽면의 그림이 눈길을 확 사로 잡았다.
"저 그림이 지난 4년 '인간 채동욱'의 삶의 궤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나"라는 직감이었다. 저물어가는 가을, 절정의 붉은 단풍을 마주한 '나신의 남자'는 충격적이었다. 무엇을 의미할까. 강렬한 성찰의 남자로 직독하는 건 편견일까, 오해일까.
화가로 등단한 채 전 총장의 또다른 인생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림에 큰 관심을 보이자 채 변호사는 자신의 방으로 기자를 곧장 안내했다. 똑같은 그림인데 이번엔 컨셉이 온전히 초록색 나무였다.
모티브와 소재는 같았다. 하지만 그림 색깔 대비가 선명했다. 하나는 온통 초록색이요. 다른 그림은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구기자! 그럼 나머지 그림은 뭘 것 같아요(사실, 생명의 나무, 봄, 가을은 나중에 알았다)"라고 물었다. 문외한이 알 턱이 없다.
그림은 4개로 구성됐다. '생명의 나무'라는 제목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면 나무 큰 줄기에 모두 '사람'이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겨울), '아기를 안은 엄마 또는 아빠'(봄, 여름), '나신의 젊은이'(가을).
유 화백은 '삭탈관직'으로 '영혼의 상처'가 극심한 채 전 총장에게 매일 17시간씩 그림 사사를 해줬다. 그림은 '고통의 시간'과 '삶의 무게'를 해소할 수 있는 치유를 줬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유화 130여점이다. 채 변호사는 작년엔 서울서 그림을 그렸다. '생명의 나무'그림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눠 6호짜리 캔버스에 담았다. 서울을 방문한 유 화백은 채 변호사의 그림을 유심히 살폈다.
"(생명의 나무(봄) 그림을 보던 유 화백이) 채 총장! 그림에서 '사람' '인간'이 보이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당시만 해도 그림엔 지금처럼 사람의 모습을 직접 그리지 않았던 터였다.
유 화백은 "나무 줄기와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사람'이 보이는 것 같은데 더 선명하게 '사람'을 넣어봐요"라고 조언했다.
스승 유 화백 견해에 따라 채 전 총장은 4점의 그림 속에 각기 다른 형상의 모습을 한 '사람'을 그려 넣었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생명의 나무',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이다.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총장님! 저 '가을' 그림은 총장님 지난 4년간 모습을 그린 것 아닌가요 하하"
짖궂은 질문이었다. 마음이 얼마나 '불' 같았을까.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그 내면을 다스려야 하는 '인내의 바닥은 도대체 어디 였을까' 라는 생각 뿐이었다.
채 전 총장은 "이 그림은 '무상(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없다)'을 표현했지. 지.수.화,풍을 나타낸 건데 우주 만물은 지.수,화.풍의 이합집산으로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라고 설명했다.
◇ 미국 '뉴욕 전시회'에서 그림 2 점이 팔리다
채 변호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단 말이지. 그림이 벌써 시집을 갔단 말이야. 그림이 팔렸단 말이지. 그림이 꼭 자식과 같아요. 그래서 그림이 팔리면 '시집간다'고 한다는 거야. 그런데 정말 시집보낸다는 말을 실감해…"
작년 10월 국정농단 수사가 시작될 무렵 미국에 사는 지인 화가가 그림을 보게 됐다. 지인 화가는 채 전 총장에게 올해 4월 뉴욕에서 열리는 'ARTEXPO NEW YORK' 전시회에 출품을 하자고 권유했다. 채 전 총장은 꺼려했지만 지인은 막무가내였다. 특히 채 전 총장은 '자신 이름이 그림에 있는데 교민들이 알면 어떻게 하냐'며 주저주저 했다.
하지만 설득 끝에 채 변호사는 '생명의 나무 4점'을 비롯해 10호짜리 그림인 '열정(PASSION)' 등 5점을 출품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화가 이름을 적시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로부터 너댓달 지난 지난 4월 말 갑자기 지인 화가의 '카톡'이 당도했다. 카톡 사진엔 전시된 그림 두 점에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생명의 나무' 여름과 겨울 두 점이 팔려나간 것이다.
"그것 참! 웃기더라구요. 갑자기 카톡을 열어보니 그림 밑에 빨간 점이 있는 거야. 그래서 물었더니 '팔렸다'는 거지. 생각도 못했어요. 내가 이렇게 (화가로) 등단할줄은…"
지금 국내에 없는 그림 두 점을 시집보낸 사연은 이랬다.
그런데 '화가 등단' 얘기 못지않게 기자를 사로 잡은 건 '열정(PASSION)'이라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 또한 '불'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새빨간 단풍'과 '새빨간 불'.
평소 기자는 검사 채동욱을 '야전군 지휘관 스타일'로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야생마'라 하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다. 그런 타오르는 '열정'이 없었다면 취임 초 정권의 '정통성'을 훅 찌르는 댓글 수사'를 할 수 있었을까?
손님이 찾아 온 사무실을 나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