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수 많은 깨진 도자기들을 퍼즐 맞추듯이 이어가며 5m 높이의 커다란 형상을 창조해낸다. 여기엔 시간성· 이질성· 다양성이 교차· 혼합· 융화하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수백년 전부터 과거에 빚어져 깨진 도자기들이 현재의 시점에 합쳐진 형태로 새롭게 선보이며 미래에 꿈꾸는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장독대, 청자, 백자, 분청사기와 같이 사용되는 흙의 재질과 굽는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생활용기에서부터 양반 사대부들의 관상용에 이르기까지 그 용도 또한 다양하다.
이런 차이성을 가진 수많은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새로운 특성의 이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신기한 나라의 출현이다. 이를 이수경 작가는 '신기한 나라의 아홉 용'이라 했다.
'신기한 나라의 아홉 용'이라는 작품 제목을 붙인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깨진 도자기들을 이어가는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그 개별 도자기들에서 용의 이미지가 많았다. 용의 전설을 추적해보니 용에게는 아홉 자식이 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의 엄마가 모두 다르다. 그 아홉 자식들 중에는 개, 사자, 염소 등이 있다. 용은 신비로운 존재로 감히 범접할 수 없지만, 그 자식들은 인간의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하고, 해악을 끼치지 않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용의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즉 용의 아들들이 어머니는 달라도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이듯이, 인종· 계급· 국가 ·계층· 성별과 같은 수 많은 분야에서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조화로운 공동체의 이상을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작품 제목의 앞 부분이 왜 '번역된 도자기'인가? 작가는 그 의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정확한 번역은 없다. 계속 오역일 수밖에 없다. 각자의 주관적 해석이 있을 뿐이다. 저는 미술이 그런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도자기는 깨지면 그 용도를 상실하는 게 일반적 통념이다. 도공들은 만들어진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면 가차 없이 깨뜨려서 버린다. 이 깨진 것, 버린 것을 재배치· 재결합해서 새로운 이미지의 형상을 재창조해낸 것은 이수경 작가의 번역 능력이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에 대한 관념을 전복시킨다. 도자기는 생활용· 관상용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깨진 것·버려진 것들은 쓸모가 없다.
그런데 이 쓸모 없게 된 것들을 모아 인문적 사고를 담은 예술적 그릇으로 쓸모 있는 것으로 작가가 번역해 낸 것이다. 이수경 작가에 손에서 빚어진 이 예술적 그릇은 생활 용기로서는 쓸모가 없다. 그래서 예술은 쓸모 없는 것을 추구한다고 했던가. 예술의 이 쓸모 없음의 추구가 인간 사고를 다양하고 풍성하게 살찌우는 역설인 것이다.
인간 관계란 늘 깨어짐을 안고 있다. 그 깨어짐의 속성을 끌어안고 다시 화해· 상생하는 길에 이를 때 더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수경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예쁘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누군가에게 뭔가 확 건드리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필자인 내게 묻는다면? 한국에서 지역·계층·빈부·남북 간 갈등, 그리고 세계적으로 인종 편견·이주민 노동자 차별 또한 그 깨어짐을 인식하고, 다시 잇고자 하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소외되고 버려진 약자· 빈자· 불법 이주민 노동자들을 공동체의 성원으로 감싸 안는 것. 이것이 중하다는 것을 '신기한 나라의 아홉 용'은 일깨운다.
작가는 또한 도자기 작업을 하면서 도자기를 만든 도공들의 각자 영혼과 영성을 느낀다고 했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이 작품 허리쯤의 청자 조각 중 연꽃 받침대 위에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스님의 얼굴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 작품은 2017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되었다. 이 작품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지금도 미국 백인 사회에서 인종 차별 시선의 굴레에 놓여 있는 흑인·아시아인, 흑인 소년과 아시아 소녀와의 사랑, 그리고 남편의 아내 살해 유기사건을 바라보는 이 부부의 딸의 시선이 등장한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부류는 흑인·여성· 살해당한 여성 등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약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소수자들이다.
전반부는 흑인 소년과 아시아 소녀가 서로 목을 어루만지며 애정 표현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서 흔히 젊은이들이 보이는 격정적인 면은 없다. 어딘가 낯설고 조심스러운,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어색한 동작이다.
그만큼 각자가 소외받는 계층의 존재로서, 그간에 마음 편한 소통과 교류가 없었기에 그 둘의 남녀간 사랑에도 그만큼 거리가 느껴지는 것이다. 짧은 어루만짐이지만 아시아 소녀의 미소에서, 흑인 소년의 애정어린 눈망울에서 각기 소외받은 인종을 넘어선 친밀감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 중반부는 흑인 소년들 여러 명이 어울려 놀이도 하고, 혹은 흑인 소년 혼자서 각기 다양한 몸동작과 표정을 연기하는 데 집중한다. 크게 눈 뜬, 하얗게 이를 드러낸 웃음, 함께 웃는 장면들에서 놀람, 당황함, 기쁨, 슬픔, 공감 등 감정을 드러낸다. 이들도 감정이 있음을, 표현이 있음을 드러낸다. 어는 장면에서는 아시아 소녀가 화난 표정으로 '사과하라 Apologize'는 말을 작게, 점점 크게, 비명을 지르듯이 한다. 흑인 소년들도 같은 방식으로 '사과하라'를 외친다.
작가는 "이 '사과하라'는 외침은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이 질 수밖에 없을 때 사과받은 싶은 정당성을 표현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종반부에서 한국에서 남편이 아내를 살해해 유기하고 12년간을 감춘 채 살아온 사건을 다룬다. 남편은 부인이 이사 가기 싫어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살해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 부부의 딸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랩송을 부르는 듯한 말과 몸동작으로 표현한다.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어도 말도 못 꺼내는 상황, 사체가 담긴 큰 용기를 발견하고 의문을 품으면서도 두려워 열어볼 엄두를 못내는 심정을 랩을 노래하듯이 말한다. 살해된 피해 여성은 죽어 없어져도 흔적이 없다. 살아 있었을 때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 '아내 살해 유기 사건'은 이 영상 작품 중반부에서 흑인 소년 두 명이 가슴에서 뭔가를 꺼내는 장면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미국에서 흑인이 가슴에 손을 넣으면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다. 총을 꺼내려는 동작으로 의심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두 소년은 각기 가슴에서 총이 아닌 빵이나 얼음조각이 담긴 유리컵을 꺼내놓는다.
이 장면은 흑인이 동작 자체만으로도 총기 살해 의심을 받는다는 사회적 인종 차별 현실을 환기시킨다. 작가는 말한다. "그래도 이러한 흑인 차별은 눈에 보이는 차별이다. '아내 살해 유기 사건'의 피해 여성은 사라졌어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은 차별보다 더한 비극이다. 약한 것보다 더 약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류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들은 2000년 출생으로 이제 막 성인이 되어가는 참이다. 그리고 아시아 소녀, 흑인 소년들이라는 소외 계층에 속한 점도 공통점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청소년들이 사춘기의 심리적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는지 보고자 했다. 그는 "이들 청소년은 가정과 사회에서 인정을 해주기는 하지만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에 불안해 한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사과하라'는 외침은 이러한 불안한 정서에서 힘 없는, 목소리 없는 약자로서 기성 세대와 그 질서에 반항의 표현인 것이다.
왜 한국 소녀와 흑인 소년의 사랑인가? 김성환 작가는 오랜 미국 생활에서 미국인이 보는 흑인과 한국인에 대한 시선을 알고 있다. 작가는 "1960년대부터 한국의 미국 이민이 이뤄졌는데, 흑인과 한국인 간에 갈등이 있었고, 두 인종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두 인종 간에 교류하고픈 생각에서 이러한 설정을 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이 아이들이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궁금했다 "고 설명했다.
이 작품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선율과 함께 다양한 장면들이 빠르게 전환되며 등장한다. 얼음 조각들이 박살나는 장면, 눈 위에 엎드려 있는 장면, 여러 색상의 천조각들이 천정의 대형선풍기에 날리는 장면 등등. 작가는 이야기 전개보다는 이러한 장면의 온도, 시간, 장소를 통해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김성환 작가의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는 자들의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화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정서는 어떤 것일까'에 있다. 그래서 그의 영상은 보이는 않은 곳, 구석진 곳을 비춰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줄거리 위주의 영화에 익숙한 필자같은 관객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 선뜻 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 표현 기법 또한 생소하기만 했다.
이건 어쩌면 우리가 너무 주류의 이야기 전개방식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자들을 비추기 위한 표현 방식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날이 왔을 때 김성환 작가의 이 영상작품 스타일 또한 대중적으로 이해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