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평생 내과 의사로 살아온 저자가 임상 경험에 더하여 현상학이라는 철학의 방법론을 응용해 병듦의 현상과 그 의미를 찾아 나간다.
20세기 서유럽에서 의학적 인간학이 태동하는 직접적 계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정신적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었다. 이 책을 쓴 헤르베르트 플뤼게도 전쟁을 겪으며 많은 환자들을 상대했는데, 이렇게 열악한 현실 속에서의 임상 경험이 그로 하여금 의학적 인간학에 몰두하게 했다. 1부에 실린 '자살, 개인의 문제인가 인간 본연의 문제인가'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자살을 시도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그들의 내면적 황폐함의 근거를 파헤치려는 목적에서 쓰였다.
그는 심장 질환을 깊이 연구했으며, 심근경색이나 그 밖의 다양한 심장병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심장 질환이 정신적으로 우울증과 연관되어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몸의 육체적 ‘중심’인 심장이 정신적으로 ‘인격’과 관계한다는 해석이 독창적이다. 심장병 증상은 환자에게 묵직한 통증을 가져다주며 진단 자체가 두려움과 절망감을 안겨준다. 환자는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세계를 등지고 내면으로 침잠한다. 죽음을 예시하는 중병을 앓는 환자들이 ‘껍데기’의 모습으로 변해가며 멍하니 말을 하지 않는 상태, 즉 강고하게 침묵하는 이유이다. 플뤼게는 이 환자들이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견디지 못한다는 특별한 경우를 관찰하는데, 이는 심장병 환자들이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는 ‘희망 없음’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저 멀리에 있을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상태’가 지금 이곳에서 원경에 놓인 경치를 바라볼 수 없게 하는 ‘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 저자에 따르면, 우울증은 “몸을 경험하는 하나의 특수 상황”이다.
이 책은 몸의 병듦뿐 아니라 정신적 가치, 다소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논한다. 내용 측면에서도 의학에서 철학적 사유로의 비약을 보여주기에 충분한데, ‘지루함’ennui에 대한 독창적 해석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루함에 대한 논의는 ‘자살’의 문제로 전개되고 ‘희망’이라는 삶의 궁극적 형식의 문제로 마무리된다. '1부. 허무와 무한'은 이 책의 백미로 저자 헤르베르트 플뤼게의 인간학이 집약되어 있다.
심장 질환을 깊이 연구하고 현장에서 치료해온 저자는 어린 심장병 환자들의 특별한 임상 사례를 소개한다. 13세 이전 특히 10~12세, 즉 사춘기를 경험하기 이전 심장병을 앓는 아동들의 경우 심장병을 자각하지 못하다가 돌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그에 비해 13세 이상의 청소년이나 성인은 심장병 징후를 바로 알아챘다). 그들은 마치 심장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상징적인 ‘심장 없음’). 그리고 심장병을 앓은 아동들은 같은 연령대의 아이들보다 성숙이 지체되었다. 저자 플뤼게는 이것이 신체생리적인 인과관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하며, 심장이 인간(인격)적 성숙과 관련되어 있다는 독자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인간의 성숙과 더불어 심장이 ‘출현’한다는 것인데, 자연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의학적 인간학으로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한 보고가 아닐 수 없다('인간학으로서의 병듦', '아이는 아픔 안에 빠져 익사한다').
헤르베르트 플뤼게 , 이승욱 (해제) 지음 |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316쪽 |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