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다 이메일을 폭로한 줄리안 어산지까지 가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 대선 해킹 사건의 배후를 놓고 이처럼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미-러 관계 자체보다는 미국 국내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오바마가 굳이 러시아에 대한 강경조치를 취한 것은 트럼프를 노린 오바마의 ‘정치적 수(手)’라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곧 취임을 앞둔 트럼프의 입지를 흔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향후 트럼프 신행정부의 정책 방향과 강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미국의 대선 해킹 사건 이슈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떼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미 대선 해킹사건 배후 놓고 진실게임 돌입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는 “이메일의 출처는 러시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앞서 위키리크스는 대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7월과 10월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와 힐러리 클린턴 선거운동본부장인 존 포데스타의 이메일을 입수해 폭로한 바 있다.
어산지의 주장은 미국 대선 해킹사건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미국 정보 당국의 보고서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어서, 미국 정가에서는 해킹 배후가 러시아인지 아닌지를 놓고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줄리안 어산지는 현지시간으로 3일 영국 런던에 소재한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폭스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지난 2달 동안 우리는 이메일의 출처는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해왔다”고 강조했다. 또 “러시아 당국이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이메일의 출처가 아니라는 것에 1000% 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오바마 행정부가 보복조치에 나선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라며 “이는 트럼프 당선자가 합법적인 대통령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지난달 29일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 대선 해킹사건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FBI 등 미국 정보당국의 보고서를 토대로, 정보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하고 관련 시설 2곳을 폐쇄하는 등 보복조치를 단행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임기 말에 굳이 미 대선 해킹 사건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하면서 냉전 이후 가장 강력한 대(對)러시아 보복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 트럼프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는 분석이다.
일단 어산지의 분석대로, 미국 대선이 러시아의 개입으로 불공정하게 치러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곧 들어설 트럼프 행정부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과 측근들이 러시아 배후설에 회의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 “러시아는 트럼프와 공화당을 갈라놓는 쐐기”
또 미국 공화당의 매파인 존 매케인과 린제이 그레이엄 상원의원 등은 러시아 배후설을 지지하며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과 미 공화당 지도부가 러시아 문제를 놓고 반목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오바마에게 있어 러시아는 트럼프 당선자와 공화당을 갈라놓을 수 있는 효과적인 쐐기(a wedge)”라며 “트럼프가 제재조치를 풀려고 하면 공화당 등 의회의 역풍을 맞게 되고, 제재조치를 그대로 두면 푸틴과의 친밀한 관계가 훼손될 것”이라고 논평했다.
해당 칼럼은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가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면 트럼프를 탄핵하고, 러닝 메이트인 마이크 펜스를 선택할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며 미 대선 해킹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를 전망하기도 했다.
트럼프 당선자는 이번 주 중으로 미국 정보당국자들과 만나 해킹 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받을 예정이다. 앞서 그는 “나는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며 “화요일(3일)이나 수요일(4일)쯤 다들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해, 트럼프 당선자가 조만간 어떤 정보를 공개할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대선 해킹사건의 배후는 러시아인가 아닌가. 논란이 커질수록 친 러시아 성향의 트럼프에게는 악재가 된다.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기도, 그렇다고 푸틴에게 보복조치를 계속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또, 이 사태를 빨리 수습하지 못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초장부터 힘이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 당선자가 예고한 보호무역주의 강화, 해외주둔 미군을 비롯한 대외정책 변화 등 공화당의 전통적 입장과 배치되는 정책들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러시아를 때려 트럼프를 잡는 오바마 최후의 한 수는 통할까. 아니면 트럼프가 역공에 성공할까. 미국 정가를 바라보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