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서적 부도…"출판을 한다는게 자괴감이 드네요"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가 설명하는 '서적도매상 부도의 의미'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일 뿐 기사 내용과 직접 연관된 바 없음.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2일 출판업계 대형 도매상인 송인서적의 1차 부도 사실이 알려져 업계가 비상에 걸렸다.

400여 출판사들의 모임인 한국출판인회의는 3일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어떤 의미인지는 출판계 사정을 아는 종사자 등이 아니라면,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 해도 저자, 출판사, 서점 정도로만 출판업계를 그릴 수밖에 없어서다.

출판사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현 상황의 의미를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 안 대표의 허락을 받아 글 전문을 게재한다.

(사진=송인서적 홈페이지 캡처)
◇ 서적도매상 부도의 의미

출판계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분들은 일개 도매상인 송인서적의 어음 부도가 무슨 큰일인가 싶으실 겁니다. 이해를 돕고자 몇 마디 적어봅니다.


일단 부도액수와 출판계 피해액수를 정리해 봅니다. 1월 3일 전해진 소식으로는 어음부도액 합산 100억 원, 출판사 잔고(즉 재고와 미지불금) 270억 원, 은행채무 50억 원, 총 420억 원이군요. 그간 거래하던 소매서점들로부터 받을 돈과 현물은 그 절반 정도라고 하고요.

1. 어음

도매서점이나 대형소매서점은 출판사에 대한 지불액이 클 때(100만원 이상) 어음을 발행합니다. 대개는 4개월짜리. 부도라는 것은 지난 연말에 기일이 돌아온 어음액 50억 원가량을 못 막았다는 얘기니까, 기일이 남은 것까지 합산하면 액수는 훨씬 커지겠죠. 지금 100억 원이라는 금액까지 나와 있습니다.

출판사들은 죄다 형편이 어려워 이 어음들을 기일까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음을 지업사와 인쇄소 등에 배서하여 지불로 씁니다. 부도가 나면 이 어음액을 현금으로 다 갚아줘야 하는 거죠.

2. 재고

출판사와 도매상의 거래는 위탁 방식입니다. 도매상의 주문에 따라 책을 맡겨놓고서 판매가 되는 만큼 지불을 받는 거죠. 여기서 판매가 되었는데 아직 지불을 받지 못한 금액과 도매상 창고에 재고로 쌓인 금액을 합쳐서 '위탁잔고'라 합니다. 위탁잔고 중 판매분과 재고분의 구분은 정확히 되지가 않습니다. 전근대적이죠. 도매상은 절대로 자기들 장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판매분이든 재고분이든 다 출판사 책인데 말이죠. 영업비밀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문제는 부도가 나면 이 위탁잔고 가운데 기 판매분은 도매상이 가진 채권으로, 재고분은 도매상의 재산으로 간주하여 주요채권자(은행 등)가 압류를 해버리는 거죠. 결국에는 자산 처분 과정에서 우선순위 담보권자들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출판사는 자기 책들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만 빠는 셈이 됩니다.

3. 출판사 처지

출판사 개별로 볼 때 작게는 수천만 원, 크게는 수억 원 대의 피해가 발생합니다. 사실 순수하게 이 금액만으로는 출판사가 금방 문을 닫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출판사들의 현 상황이 문제죠.

대개의 출판사는 경영 상태가 너무 빡빡하여 그달 그달을 버티는 중이고, 대부분이 은행 등의 채무를 떠안고 있습니다. 짐을 잔뜩 지고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그 위에 조약돌 하나를 더 얹으면 그 조약돌 때문에 전체 짐에 깔리고 마는 거죠.

대형출판사는 도매상과의 거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강자이기 때문에 지불 조건이 좋습니다. 현금을 받거나 아니면 도매상이 가진 타사 어음으로 지불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도 완전히 피해가 없지는 않겠죠. 그러나 중소형 출판사는 그러지를 못하여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출판사들은 ‘일원화’라고 하여 부도난 도매상에 유통을 완전 맡긴 경우도 있고, 상대적으로 의존도가 높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폭망’했다는 표현이 맞을 텐데. 저도 피해가 크지만 제 주변 출판사들 중 이렇게 다 맡긴 경우가 있어서 가슴이 찢어집니다.

4. 해결방법

방법이 없습니다. 위탁잔고는 공중으로 사라져버리고, 어음부도액은 고스란히 빚으로 바뀌어 출판사가 책임을 져야 하죠. 앞으로 수개월, 1년 이상을 버티며 차츰 해결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자금이 튼튼치 못한 출판사들은 못 버티는 경우도 생길 거고요.

심지어 자기 책을 채권단으로부터 되사들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그 책들이 흘러나가서 다른 도매상과 유통채널을 통해 반품이 되면 두 배로 손해를 보니까 적정 가격으로 사버리는 겁니다. 이것도 여유가 있는 출판사의 경우인데, 웃지 못할 상황이죠.

정부의 공적 자금이 이럴 때 투여되야 하는데, 그것도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공적 자금을 사기업에 줄 수도 없고. 그래서 공적인 성격의 채권단 내지 인수단이 구성되어 이곳에 자금을 투여해서 급한 어음을 지불해주고, 지분 인수를 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 ‘주체’를 만들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채권자 중 가장 액수가 큰 은행이 먼저 떵떵거리고 나오겠죠. 그리고 공적 자금으로 회생한다 해도 그게 누구를 살리는 건지 애매합니다. ‘한국출판협동조합’이라는 약간의 공적 성격을 가진 유통 단체가 있는데, 이런 데서 인수하면 좋을 텐데, 가능할지는 모르겠고 단순한 희망사항입니다. 이 정부가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칠지도 의문이구요.

'한국출판인회의'나 '대한출판문화협회'와 같은 양대 출판단체는 사단법인이고 임의단체라서 교통정리는 할 수 있어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단행본 출판사 위주인 한국출판인회의가 당사자가 될 수는 있는데, 채권단의 위임을 받아 채권자 대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덧말.

여튼 출판사들의 심줄이 질기기는 합니다. 숱한 고초들이 있어도 어떻게든 버티고 이제까지 왔으니까요. 물론 피를 째고, 넘어지고, 별별 고통을 다 겪겠죠. 지금은 다만 한숨을 쉴 시간…. 어음을 지불해 준 거래처들의 전화가 쏟아집니다. 창고의 재고는 어떻게 되는 건지 좌불안석이구요. 뭘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죠. 답답해서 이런 글로 정리나 하고 있습니다. 출판을 한다는 게 말 그대로 '자괴감'이 드네요.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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